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한성부판윤,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28년 지평이 되어 역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언로의 보장을 요구하는 과격한 소를 올려 삭직되었다가, 다시 정언으로 재서용되었으며, 이후 집의·사간 등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731년 장릉(長陵)을 옮기는 데 개폐봉관(開閉封官)으로 공이 있어 가자(加資)되었다.
1734년 승지로 전임되었으며, 2년 후인 1736년 영조가 석곶현(石串縣)에 행차하여 친히 금군(禁軍)을 지휘하여 어영군(御營軍)을 공격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중 병방승지로서 어명을 잘못 전달하여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대사간과 승지를 번갈아 지내고, 외보(外補)되어 영암군수·영해부사를 역임하였다. 1743년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여 다시 승지·대사간을 거쳐, 병조·호조의 참판이 되었으며, 1753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다시 형조참판으로 전직되었다가 도승지를 제수받았다.
1760년 한성부판윤으로 옮겼다가 1764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는데 아들인 참판 한광조(韓光肇) 역시 뒷날 기로소에 입사하여 부자기사(父子耆社)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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