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충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경상좌도수군절도사|원주목사
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청주(淸州). 1467년(세조 13) 구치홍(具致洪)이 총통군·약장(藥匠) 등을 인솔하고 갈 때 함께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 3)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헌부에서 일찍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어느 수령이 한 사족의 집과 혼인을 의논하고 납채(納采)까지 한 것을, 그가 꾀하여 빼앗아 아내로 삼은 뒤에 3일 만에 버리고 다시 아내를 얻었다하여 잡아다가 추국하게 하였다.

1473년 사헌부로부터 처가 있으면서 또 처를 취했다하여 탄핵을 받았다. 1475년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강릉대도호부사(行江陵大都護府使)를 지냈으며, 1479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창원부사(行昌原府使)가 되었으나 7월 이후 전에 충청도절도사(忠淸道節道使)가 되어 그 도의 수령과 혼인을 다투다가 파직되었다.

또한 성품이 망령되어, 백성을 다스리기에 합당치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전에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제수되었다가 대간이 탄핵하여 체임되었는데, 지금 다시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제수했다며 탄핵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481년에는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 북경(北京)에 가서 팔참로(八站路)에 보(堡)와 진(鎭)을 설치하여 사절의 왕래를 편리하게 한 데 대한 사의(謝意)를 표하였다.

1482년 북경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하고, 이어 『청화집(淸華集)』과 『유향신어(劉向新語)』와 『유향설원(劉向說苑)』과 『주자어류(朱子語類)』와 『분류두시(分類杜詩)』와 양각서판(羊角書板)을 진상하였다.

1487년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491년 원주목사로 제수되는 것에 대해 많은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북방 정벌을 준비할 때 후원장(後援奬)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울지령 남쪽 동구(洞口)에 주둔하여 싸웠다. 1494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정주목사(行定州牧使)가 되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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