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한치인(韓致仁)이다.
1469년(예종 1)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고, 1471년(성종 2) 장악원 부정(掌樂院副正)으로 아마(兒馬) 1필이 하사되었다. 1474년에 왕대비의 명을 받고 행사직(行司直)으로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집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고, 1476년 동부승지로 선물을 태평관(太平館)에 가지고 가서 명나라 사신에게 선사하였다. 이어 통정대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통정대부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병방승지(兵房承旨)·우승지(右承旨),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1479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차정(差定)되었다. 그리고 입조(入朝)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장례원판결사(行掌隷院判決事),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장례원판결사(行掌隷院判決事) 서원군(西原君),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1481년 성절사로 북경에서 돌아온 뒤 별인정(別人情)으로 백저포(白苧布) 30필(匹), 흑마포(黑麻布) 30필, 인삼(人參) 20근이 하사되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받들고 중국 북경에 가서 사은하였다.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서 돌아와 중국 사정을 전한 뒤 가선대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표문을 받들고 북경에 가서 성절을 하례하고 북경에서 돌아온 뒤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1484년에 경상도관찰사로서 군자창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 뒤 이듬해 동지사(同知事)가 되고 1486년 북경에 가서 성절을 하례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으나 곧 가선대부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 1488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서원군(西原君) 겸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1489년 가선대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나, 1491년 한성부좌윤을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특진관(特進官)에 이어 가선대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고, 1494년 가선대부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