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 ()

울산항
울산항
자연지리
개념
선박의 출입, 사람의 승선 · 하선, 화물의 하역 · 보관 및 처리, 해양친수활동 등을 위한 해양시설. 항구.
이칭
이칭
항구
정의
선박의 출입, 사람의 승선 · 하선, 화물의 하역 · 보관 및 처리, 해양친수활동 등을 위한 해양시설. 항구.
개설

항만에는 천연항인 항만(harbour)과 인공항인 항구(port)이 있으며, 전자는 외부가 갑(岬), 섬, 암초 등이 천연의 지형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고, 후자는 방파제, 안벽, 야적장 등 인공적인 구조를 가미한 것이다. 그래서 항만은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 및 정박할 수 있는 자연적으로 보호된 수역을 말하고, 항구는 인공적으로 수륙연결 기능을 갖추고 승객 또는 화물의 하역에 관한 제반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연원 및 변천

항만은 인간이 바다로 진출하면서 발달하게 되었는데, 고대 페니키아에서는 B.C. 13세기경에 시돈(Sidon)과 티레(Tyre)에 인공항을 건설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고대에 유명한 항만으로 팔 섬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항이고, 그밖에 아테네의 피레에프, 로마의 오스티나, 그리스의 로도스 항이 주요한 항만으로 대부분이 자연항이었으나 부분적으로 인공물을 설치하였다. 고대의 항만은 대부분이 하구 부근에 입지하여 토사의 퇴적으로 항만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항만의 규모는 12세기 중엽까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역 간의 인적·물적교류가 많지 않아 선박의 규모도 작았으며 자연항으로 항만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역 간의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증기선, 유조선, 컨테이너선 등의 규모가 큰 선박이 등장하면서 인공적인 항만시설이 필요해져 그 규모가 크게 되었다.

고대

개항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항만과 항구도시의 발달이 미약하였으나, 경기만·태안반도·남해안·울산 등 전략적 요충지나 정치 중심지 부근에는 포구가 발달하였다. 고대의 항만으로 알려진 곳으로는 강화의 혈구진(穴口鎭), 인천의 능허대(凌虛臺), 남양의 당성진(唐城鎭), 완도의 청해진(淸海鎭) 등이 있었다.

혈구진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도에 설치하였던 신라 하대의 군진으로,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변경의 요충지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하여 이를 요새화하였는데, 844년(신라, 문성왕 6) 8월에 강화도에 이 항만을 두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829년(신라, 흥덕왕 4)에 설치한 당성진이 본래 당은군(唐恩郡)을 개편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혈구진 또한 종래의 혈구군(穴口郡: 경덕왕 때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을 개편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 혈구진의 군사세력은 뒷날 고려 태조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능허대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낮은 언덕이다. 삼국시대 초기 한강 유역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육로는 고구려가 장악하여 반도의 남쪽에 있는 백제와 신라가 중국과 직접 교류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부득이 해로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능허대는 백제가 개척한 대중국 항로의 기점이었다. 이 포구는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에서 가장 가까운 항만이었다.

이곳을 출발하여 덕적도(德積島)를 거쳐 산둥반도에 이르는 항로는 가장 짧고 안전한 해로였다.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까지 중국의 동진(東晋)·송(宋)·북위(北魏)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므로 능허대는 약 100년간 백제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당성진은 경기도 남양만의 마산포(馬山浦)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은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뒤 중국에 대한 항로의 기점으로 개발한 항만인데, 당항성(黨項城)이라는 요새를 구축함으로써 발전하였다. 신라는 564년(진흥왕 25)부터 이 항구를 통하여 중국의 제(齊)·진(陳) 등과 교류하였고 뒤에는 수·당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태안반도의 당진·한진(漢津)과 일본과의 교통로가 열렸던 남해안의 영암·강진·부산·울산 등 포구가 많았다.

신라는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에 왜구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신라 조정은 근해에 출몰하는 왜구와 중국 해적을 막기 위하여 강화에 혈구진, 남양에 당성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청해진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청해진은 828년(신라, 흥덕왕 3)에 장보고(張保皐)가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설치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로서 해적을 소탕한 뒤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는데, 청해진은 당나라와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계무역기지 구실을 하였다.

청해진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매우 뛰어나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장보고가 당나라에 보낸 상인을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 그의 선박을 교관선(交關船)이라 하였다. 청해진은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폐쇄되었는데, 당시의 항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실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왜인들이 신라의 조선술과 축항기술을 배워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능허대·당성진·청해진 등에도 기본적인 항만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고려는 태조 왕건이 송악 일대를 근거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개국 초부터 송나라와의 무역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고려의 대외무역 창구인 예성항에는 송·일본·유구·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출입하였으며, 부산포·염포 등지에도 왜인들이 드나들었다. 예성강은 개경 남서쪽 40리에 있는 예성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오늘날 개풍군 서면 강리 일대의 서강(西江)에 해당한다.

예성항은 고려 조정이 개경의 관문으로 개방한 항구로서 송나라에 파견하는 사절과 송나라의 사절이 출입하는 항만이었다. 예성항은 예성강·임진강·한강 등의 하구와 가깝기 때문에 많은 토사가 퇴적되어 오늘날에는 항구로서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기본적인 부두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조선

조선시대의 항만은 고려 때 정비된 조운제도(漕運制度) 및 삼포개항(三浦開港)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 전기에도 춘천의 소양창(昭陽倉),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원주의 흥원창(興元倉), 백천(白川)의 금곡창(金谷倉),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 등 5개의 강창과 아산의 공세곶〔貢稅串〕, 용안의 덕성(德城), 나주의 영산(榮山), 영광의 법성 등의 해창(海倉)을 두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군산의 군산창, 창원의 마산창,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을 신설하였다. 18세기 말 각 창에 배치된 선박수는 군산창 19척, 법성창 25척, 공세곶창 12척, 마산창 20척, 가산창 20척, 삼랑창 15척 등이었다. 조창의 항만시설이 어떠하였는지는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주요 항만이었던 마산·강경·인천의 성창포(城倉浦: 지금의 만석동 일대)와, 하항이었던 영산포·목계 등지에서 간단한 항만시설이 확인되었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옛 창터에는 1523년(중종 18) 60여 칸의 창고를 건립하고 주변에 성을 쌓았으며, 조운선이 정박할 수 있는 간단한 항만시설도 갖추었다.

인천 성창포는 삼남의 조운선이 험난한 염하(鹽河)를 통과하기 전의 마지막 기항지였으므로 많은 선박들이 집결하였다. 성창포 부두는 묘도(猫島, 괭이부리)와 북성포대로 둘러싸인 작은 만을 이루며, 성창포와 묘도는 석축돌제로 육지와 연결하여 외해의 풍랑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였다.

병인·신미양요 이후 해안 방비를 위하여 인천 해안에 30여 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각 포대 앞에 방파제를 쌓았다.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왜구에게 개방한 삼포의 무역과 압록강변의 국경무역으로 구분된다. 국경무역은 육로를 배경으로 하는 반면 삼포무역은 해로와 항만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1407년(태종 7) 왜구의 회유책으로 동래의 부산포(富山浦)와 웅천의 내이포(乃而浦)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였으며, 1426년(세종 8)에는 울산의 염포(鹽浦)를 다시 개항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킴에 따라 부산포와 염포를 폐쇄하였다가 1521년(중종 16)에 부산포를 다시 개항하여 임진왜란까지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에 부산포의 절영도(絶影島)에 임시 왜관을 설치하여 왜와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1607년(선조 40) 왜관을 두모포(豆毛浦)로 옮겼다가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으로 확정하였고,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에 의거하여 이 지역을 일본전관거류지로 개방하였다.

왜관의 설립과 임진왜란이 부산지구에 대한 전략상의 중요성을 재평가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으므로 부산에는 부산진·수영·다대진·금정산성 등의 많은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고려·조선시대에는 항만도시라고 할 만한 도시가 거의 없었으며, 항만도시는 개항을 계기로 출현하였다.

근대

오늘날 주요 항만도시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개항된 부산(1876년)·원산(1880년)·인천(1883년)·목포·진남포(1897년)·군산·마산·성진(1899년), 용암포(1906년)·청진(1908년)·신의주·나진·웅기·해주·다사도(1910년) 등이며, 그 밖에 공업항이나 전략 요지로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흥남·포항·진해·여수항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항만개발은 14개 개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마산·진해·여수 등 38개 지정항과 250여 개의 소규모 항만의 개발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개항 초에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항만이 전혀 없었으며, 1906년(광무 10)에 부산·인천·남포·평양·원산·신의주·군산·목포·청진·성진·마산 등의 11개 항구에 긴급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도 미곡의 반출과 대륙침략의 교두보 확장 및 공업항 건설을 위하여 항만의 수축 및 확장공사를 계속하였다. 주요 항만별로 개발 사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76년(고종 13) 개항 당시의 부산항은 용두산 남쪽의 일본전관거류지에 국한되었는데, 이 구역은 용두산이 바다와 면하여 해안에 평지가 없었다.

개항 당시의 항만시설은 용두산 아래의 간단한 방파제뿐이었고, 이 방파제 안에 7천여 평의 선류장이 있었다. 따라서 부산항은 개항 초부터 항만용지의 부족과 시설 미비로 인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부산항의 개발과정은 4단계로 구분된다.

1902∼1910년의 제1기 개발 사업은 남포동과 대교동 일대의 매축사업이었다. 4만 평 이상의 매축지에 세관과 부산역·기선회사 등을 건설하고 해안도로를 개통하였으며 부두에는 잔교를 건설하였다.

1911∼1918년의 제2기 공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음에 따라 실시한 부산항 확충공사이다. 대규모 준설사업을 시행하여 내항의 수심을 7m이상으로 유지하였고, 3,000∼4,000톤급의 기선이 접안할 수 있는 물양장·잔교·창고·항만철도 등을 건설하였다. 1919∼1927년의 제3기 공사는 부산항의 물동량 급증에 따른 확장공사였다. 내항의 수심을 8.1m로 준설하고 1·2부두를 확장하여 7,000톤급 기선을 접안하였다. 내항에는 전기·상수도 시설을 확충하였고 대규모의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1928∼1945년의 제4기 공사는 대륙침략전쟁 물자의 수송에 따른 부산항 확장공사였다. 이 기간에 영도·남포동 북쪽 해안 일대의 토지 6만여 평을 매축하였다. 이 토지는 공업항 용지·물양장·도로 용지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부산항의 하역능력은 연간 400만 톤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인천항은 자연조건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인공시설을 갖추어 대항구로 발전하였다. 본래 만석동 일대의 성창포가 부두시설을 갖춘 포구였으나 외국인 조계(租界) 전면의 제물포가 내항으로 개발되었다. 개항 초 인천에 입항하는 선박의 화물은 내항 밖 5㎞ 해상에서 소형 선박으로 옮겨져 양륙되는 이중 하역의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곤란을 극복하기 위한 인천항 개발공사는 1884년(고종 21) 이래 계속되었다. 1884∼1920년의 제1기 초에는 제물포 해변에 소규모의 돌제(突堤)를 축조하고, 제물포와 북성포의 해면매립공사를 실시하였다. 인천항은 경부선 개통 이전에는 전국 제1의 무역항이었으나 1907년(융희 1)부터 부산항에 압도되었고 내항에 토사가 퇴적되어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11∼1918년에 2중 갑문식선거(二重閘門式船渠)를 축조하여 자연적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4,500톤급 기선 3척이 항상 접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선거 주변의 매축지에는 창고·저탄장·세관·철도 등을 설치하였다.

1921∼1960년의 제2기 항만공사는 물동량의 증가와 침전물 증가에 따른 내항의 기능 마비를 타개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이 기간에는 정기적인 준설 사업과 대규모 매축 공사를 실시하여 약 30㎢의 토지를 획득하였고, 이 토지의 대부분을 만석동·송현동의 공업항 부지와 제2선거부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60년까지는 항만 개발 사업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1961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제3기 항만공사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거하여 실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수립한 제2선거계획을 백지화하고 인천 내항을 완전히 선거화(船渠化)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2개의 갑문을 설치하여 갑문 내 바다 면적이 1.5㎢에 달하였으며, 이 안에 29척의 대형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8개의 부두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인천항에서 개항 이래 100여 년간 매축한 토지는 약 80㎢에 달하며, 이 토지는 임해공업단지·창고부지·항만부지·시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항만시설

항만은 화물의 하역·선적과 여객의 승선과 하선에 따르는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설이 필요하다. 항만시설이란 정박지·부두 등 항만의 제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설을 말한다. 이에는 방파제·호안·수문·갑문 등의 외곽시설과 안벽·잔교·부잔교·부표 등의 계류시설, 철로·도로 등의 교통시설, 크레인·창고·야적장·저탄장 등의 하역 및 보관 시설, 무선 전신소·등대·항로 표지 등의 통신시설, 급수·급유시설, 여객 수용시설 등이 있다.

항구에는 자연항과 인공항이 있으며, 사용목적과 위치 및 입지조건과 용도에 따라 상항·어항·공업항·군항·대피항 등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상항이 항만을 대표한다. 상항이란 상선이 드나들면서 화물을 선적·하역하고, 여객이 타고 내리는 수륙교통의 연계 지점이다. 부산·인천·목포·여수·포항항 등이 이에 속한다.

어항이란 어선들이 어로 용품을 공급받고 어획물을 양륙하는 항구로 다대포·덕적도·통영 돈지·강릉 정동항 등을 말하는데, 어항은 상항·공업항보다 규모는 작고 도처에 많이 분포한다.

공업항은 임해공업지대에 부속되는 항구로서, 화물선이 공장부지까지 접안하여 공업원료나 연료를 직접 하역하고 동시에 제품을 선적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일제는 인천시 만석동 일대에 공업항을 건설한 바 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울산·북평·온산 등지에 대규모 공업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평택항·당진항 및 대산항 등은 대규모 공업항이다.

군항은 군사적 목적으로 군에서 관리하는 항구로서, 해군함대의 작전기지 또는 육군의 수송기지로 이용된다. 조선시대에 수영(水營)이 설치되었던 부산·통영·여수·우수영·오천·교동항 등과 오늘날의 진해가 대표적인 군항이다. 대피항은 항해 중인 선박들이 태풍 등 불의의 기상이변으로 대피가 불가피할 때 이용하는 곳이다. 울릉도의 저동항(苧洞港)과 흑산도·제주·서귀포 등은 동해 및 동중국해에서 조업 중인 어선이나 항해 중인 선박들이 대피하는 항만이다.

항만은 위치에 따라 연안항·하구항·하항(河港)과 호항(湖港)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대형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연안항과 하구항이다. 하구항은 하천의 입구에 위치하므로 육상 교통로뿐만 아니라 하천 수로를 통하여 운반되는 화물까지 집산하는 이점이 있다. 독일 엘베 강 하구의 함부르크, 미국 허드슨 강 하구의 뉴욕, 프랑스 센 강 하구의 르아브르, 중국 주장(珠江) 하구의 광둥, 우리나라의 진남포·군산항 등이 이에 속한다.

현황

2009년 현재 국민경제와 공공의 이해에 밀접한 관계가 있고 주로 외항선이 입항·출항하는 항만인 무역항은 부산항·인천항 등 28개이고, 주로 국내항 간을 운항하는 선박이 입항·출항하는 항만으로서 지정된 연안항은 연평도항·대천항·비인항 등 24개가 분포하고 있다<표 1>. 24개 무역항의 안벽의 총길이는 135.5㎞이고, 방파제는 56.3㎞, 물양장은 44.7㎞, 잔교는 126기, 접안능력은 745척이다.

안벽의 길이는 부산항·울산항·인천항·포항항의 순이고, 방파제는 포항항·울산항·부산항·제주항·군산항의 순이며, 물양장은 부산항·목포항·통영항·삼천포항의 순이고, 잔교는 목포항 27기로 가장 많고, 이어서 인천항(22기), 군산항(13기), 통영항(12기)의 순으로 서해의 조석간만의 차이로 인하여 서해안의 항만에 많다. 그리고 선박의 접안능력은 부산항이 158척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울산항(102척), 인천항(89척), 광양항(78척), 포항항(53척)의 순이다.

<표 1> 무역항의 주요 항만시설(2009년)

자료:『통계연보』(국토해양부, 2010)

항만시설은 1961년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됨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때의 우리나라 총수출입 화물량은 410만톤에 불과하였으나 1980년에는 9541만 2000톤, 1990년에는 2억 1467만 3000톤, 2000년에는 4억 6617만 6000톤, 2009년에는 5억 8500만 4000톤으로 1961년에 비해 143배나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입출항 선박의 총 톤수도 1975년 1억 3750만톤, 1983년 3억 9027만톤, 1990년 7억 1633만톤, 2000년에 17억 6100만톤, 2009년에 27억 5800만톤으로 급증하여 주요 항만의 시설확장과 하역능력의 증대는 필수적이었다.

1999년 주요 항만의 하역능력은 부산항이 연간 8476만톤으로 제일 많았고, 광양항 7380만톤, 인천항 5659만톤, 포항항 4454만톤의 순이었으나 2009년은 부산항이 2억 172만 7000톤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광양항 1억 6440만톤, 인천항 9260만톤, 평택항·당진항 5667만톤, 포항항 5536만톤, 울산항 5117만톤의 순으로 바뀌었다.

한편 연안항의 항만시설은 안벽의 길이가 5.7㎞, 방파제가 19.1㎞, 물양장은 18.5㎞이고, 잔교는 모두 12기이며, 선박의 접안능력은 48척으로, 구룡포항은 안벽, 선박의 접안능력이 가장 많고, 방파제는 한림항·성산포항이, 물양장은 부산남항이 가장 길다<표 2>. 2009년 현재 연안항의 항만 하역능력은 애월항이 155만 6000톤, 이어서 한림항이 136만 4000톤, 성산포항이 101만 1000톤의 순이었다.

<표 2> 연안항의 주요 항만시설(2009년)

자료:『통계연보』(국토해양부, 2010)

2008년 현재 어항수는 모두 969개가 있는데 이 중에서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 관리하며 이용범위가 전국적인 어항 또는 도서·벽지에 소재하여 어장의 개발 및 어선의 대피에 필요한 국가어항인 1종 어항은 110개, 시·도지사가 관리하며 이용범위가 지역적이고 연안어업에 대한 지원의 근거지가 되는 지방어항인 제2종 어항은 284개, 시장·군수·구청장이 관리하며 어장의 개발, 어선의 대피에 필요한 독립된 섬 또는 피항지에 소재하는 어업 근거지로 어촌의 생활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촌정주어항인 3종 어항은 575개이다<표 3>.

국가어항이 가장 많은 전라남도는 31개의 어항이 분포하여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경상남도(19개), 경상북도(15개), 강원도(14개)의 순이고, 지방어항은 전라남도가 91개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경상남도(61개), 충청남도(28개), 경상북도(23개)의 순이며, 어촌정주어항은 경상남도가 344개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전라남도 79개의 순이었다. 동력어선으로 현지어선수는 지방어항의 경우 전라남도(4,896척), 경상남도(3,387척)의 순이었고, 어촌정주어항은 경상남도가 6,281척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전라남도가 3,269척의 순이었다.

<표 3> 어항 종류별 주요 시설

자료: 농림수산식품부(http://www.mifaff.go.kr)

참고문헌

『통계연보』(국토해양부, 2010)
『항만용어사전』(김용균, 청문각, 2002)
『국토와 민족생활사』(최영준, 한길사, 1997)
『해사연감』(코리아쉬핑가제트사, 1984)
『한국국토개발사연구』(김의원, 대학도서, 1983)
『한국지지 - 지방편 Ⅰ-』(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항만건설사』(해운항만청, 1978)
농림수산식품부(www.mifaff.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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