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 ()

염전
염전
자연지리
개념
바닷물을 농축시켜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자연 증발지로 구획된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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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염전은 바닷물을 농축시켜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자연 증발지로 구획된 토지이다. 천일염전·소금강 염전·돌소금 염전 등으로 나누는데 천일염전이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천일염전은 생산지에 따라 그 영양성분과 맛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해안 도처에서 소금이 제조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도염원을 두어 국가가 소금을 직접 제조·판매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라도 영광군이 전국에서 소금가마가 가장 많았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은 경기도 부천군에서 시도되었다. 현재 전라남도의 염전 면적이 가장 넓다.

정의
바닷물을 농축시켜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자연 증발지로 구획된 토지.
염전의 분류

염전은 천일염전, 소금못 염전, 소금강 염전, 소금호 염전, 소금벌 염전, 돌소금 염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이용되는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 등으로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데, 생산지에 따라 그 영양성분과 맛이 다르다. 또 천일염전은 동남아시아에서 지중해 연안 및 라틴 아메리카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염전방식에는 기후조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입지에 제약을 받는다.

천일염전의 종류는 염전의 축조된 저수지 지반 높이의 차이에 따라 고지식(高地式) 염전과 저지식(低地式) 염전으로 나눈다. 고지식 염전은 염전 증발지 마지막 단의 지반 높이보다 낮게 축조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고, 저지식 염전은 증발지 최상단 지반 높이보다 높게 축조된 형태를 말한다. 또 각 증발지의 낙차의 차이에 따라 계속낙차와 역낙차의 흐름에 따라 유하식(流下式) 염전과 급상식(汲上式) 염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금못 염전은 과거에 바다였던 지역이 육지화되어 소금기를 많이 머금고 있는 곳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부어넣은 다음 흙속의 소금이 녹도록 하여 햇빛과 바람으로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소금강 염전은 소금못과 같이 흙속의 소금기가 지하수에 의해 녹아 건조지역의 강바닥에서 소금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소금호는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육지화되어 융설수에 의해 땅속의 소금기가 녹아 산기슭을 흐르면서 소금호를 형성하는데 소금물이 계속 유입되어 점차 농도가 짙어지면 호수의 바닥에 소금결정들이 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소금호 염전은 중국,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건조지역, 미국과 남아메리카의 중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금벌 염전은 소금호의 수분이 모두 증발되면 소금호 부근에 소금벌을 형성하는데, 지각변동에 의해 소금이 뒤덮인 산이 되기도 한다. 소금호가 지각변동에 의해 약 2억년 동안 퇴적층을 이루어 소금이 바위처럼 단단해진 돌소금 염전이 형성되는데 이는 유럽과 미국에 주로 분포한다.

연원 및 변천

소금의 역사는 원시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채취하거나 해조(海藻)를 태워서 얻기도 하였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염분을 함유한 물이 솟아 나와 대상(隊商)은 그것에서 소금을 얻었다.

유럽에서는 철기시대부터 암염이 이용되었고, 때로는 암염이 있는 곳에 물을 붓고 소금이 녹은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또 사해(死海)나 솔트레이크(Salt Lake city)와 같은 염호에서 얻은 조염(粗鹽)을 녹여 증발시키고 정제하여 소금을 얻었다.

동양의 문헌에서는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엮었다고 전해지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약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약물 중독의 해독제로 소개되었고, 그 밖에 B.C. 27세기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1288년(충렬왕 14)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 판매하는 전매제도로 재정수입원을 삼았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의 소금 생산량은 150만 톤 이었고 소비량은 210만 톤으로 부족분은 일본, 타이완, 청나라로부터 수입하여 충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염전 개발은 부족국가 시대인 옥저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소급된다고 추측되는데, 그 이후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복을 보이면서 완만한 변화 · 발전을 이어왔다. 바다에 면하지 않은 충청북도를 제외하고는 예로부터 해안 도처에서 소금이 제조되어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은 1907년 당시 경기도 부천군 주안에서 시도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부의 일본인 기사 나카우쿠 오쿠라(中與大藏)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주안간석지 약 1만㎡를 택하여 천일제염 시험 염전을 축조하였다. 지형, 지질, 기후 등 채함(採鹹)활동이 유리한 서해안이 천일제염에 적합하여 주안염전에서의 소금 제조가 성공을 거둠에 따라 1911년까지 주안에는 99정보(98.5㏊)의 염전이 조성되었다. 주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천일염으로 천일제염 선구지가 되었다.

초창기 인천주안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의 양은 연간 720톤 가량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에 따라 1918년 무렵엔 212정보(210.2㏊)에 이를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어 1921년 남동 지역에 300정보(297.5㏊), 1925년 군자 지역에 575정보(570.3㏊)를 조성하여 1933년에 이들 세 지역의 염전면적은 1,115정보(1,105.8㏊)에 달하여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 가량인 15만 톤을 생산하였고, 소래에도 염전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주안염전과 그 일대 풍경은 1960년대 후반 경인고속도로가 뚫리고 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광복 이전까지 개발되었던 염전은 약 7,000㏊로서, 주로 북한 지역에 많이 분포되었다. 당시 황해도의 연백염전(延白鹽田), 평안남도의 귀성염전(貴城鹽田), 평안북도의 청천염전(淸川鹽田) 등은 모두 그 면적이 1,000㏊를 훨씬 넘는 대규모의 염전이었다. 이 밖에도 널리 알려진 평안남도의 광량만염전, 평안북도의 남시염전(南市鹽田)과 평안남도의 덕동염전(德洞鹽田)도 중요한 염전이었다.

광복 당시 남한의 염전 면적은 약 2,800㏊이었고, 제염 능력은 약 13만 톤이었는데 염의 부족량은 약 10만 톤에 달하였다. 또 6·25전쟁 직후에는 약 1,300㏊의 연백염전이 북한 지역으로 되었고, 일부 염전은 크게 피해를 입어 생산량이 격감하자 정부에서는 민영 염전의 개발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1955년에는 염전 면적이 1만 500㏊(국영 염전 2,000㏊, 민영 염전 8,500㏊)로 확장되었고, 소금 생산고는 35만 톤으로 증가되어 비로소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개발된 염전은 숙전(熟田)이 되고 추가로 염전이 조성됨에 따라 생산과잉 현상이 발생하여 정부의 전매제도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민영 염전의 면적을 축소시켰고, 전매제도의 폐지에 의해 제염업은 완전히 민영화하게 되었다. 즉 1961년 12월 30일 「염전매법」이 폐지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실시해 오던 염전매는 종지부를 찍고, 1962년 1월 1일부터 제염사업은 완전히 민영화로 전환되었다.

내용

염전은 염전과 외해를 나누는 방조제 역할을 하는 외제방, 바닷물을 저장해 두는 저수지, 저수지에서 이동해 온 바닷물을 농축시키기 위해 조성된 증발지, 증발지에서 이동해 온 농축함수를 소금을 채취할 수 있도록 더 농축시키는 결정지, 그리고 비가 오거나 겨울을 대비하여 증발지와 결정지 내의 염도가 높아진 바닷물을 보관하는 덮개가 설치된 웅덩인 함수류, 소금을 보관하는 염퇴장으로 구성된다.

제염의 증발방법은 자연증발법과 전오법(煎熬法)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재래식으로 염전 주위를 제방으로 둘러싸지 않은 무제방(無堤防)의 입빈식(入濱式) 염전 · 양빈식(揚濱式) 염전에 의한 제염방법과 천일염전에 의한 제염 방법, 기타 제염 방법이 있다. 전오법은 직화열 · 증기열 · 온천열 등을 이용하는 제염방법이다.

천일제염이 시작되기 전에는 전오염전이 발달하였는데, 이 제염법은 조선시대에 해안지방에서 주로 행해진 것으로 농축된 바닷물을 바짝 졸여 염을 얻기 위한 재래식 염전을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전국에서 염분(鹽盆)이 가장 많았던 군현은 전라도 영광군으로 113개였으며 조기잡이 어업 중심지로 파시가 이루어지는 지역에 입지하였다.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이 103개, 황해도 강령현(康翎縣)이 89개, 그밖에 옹진현, 울진현, 연안도호부, 평해현(平海縣) 등도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다. 염소(鹽所)가 가장 많이 분포한 군현은 남양도호부로 44개였고, 나주목과 강진현은 각각 35개였다.

이와 같이 대규모의 전오염전이 발달한 지역은 판로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영유현은 평양부와 인접해 있었으며, 남양도호부는 수원, 한성과 인접해 있었다. 그리고 연안도호부는 연백평야를 중심으로 인구밀집지역과 어량(魚梁)이 발달한 지역에 인접해 있었다. 그리고 울진과 평해현은 안동, 봉화, 청송 등 경상북도 북부 산간 지역과 동해안의 주요 소금 공급지였다.

전오염전의 제염방법은 염전식과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으로 나눌 수가 있다. 해수직자법은 해수를 직접 가마솥에 넣어 가열함으로써 연료비가 많이 들고 소금의 순도가 낮아 연료가 풍부한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을 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염전식 제염법을 통해 전오염을 생산하였다. 염전식 제염법은 갯벌의 개흙에서 염수를 뽑아내는 채함과정과 염수를 소금 가마솥에 넣어 서서히 가열하는 전오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채함과정을 위해 염전을 조성하였는데, 남서해안의 경우 갯벌에, 동해안에서는 해안사구 위에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천일제염은 지형이 평탄한 간석지가 필요하고, 하천에 인접되어 있지 않으며 산지가 없어 통풍 상태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비교적 강수량과 강수일수가 적으며, 증발량이 많고 일사가 강할 뿐만 아니라 조차가 심하고, 점토와 사질의 분포와 넓은 간석지의 발달 등이 중요시되므로, 염전은 축조 상 유리한 자연조건을 지닌 곳에 입지하게 된다.

천일염전의 적지로 토질이 점토 40∼50%, 사토 50∼60%이고, 지반이 삭망의 만조 때 수면보다 2∼2.5m 낮은 곳으로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염전을 만드는데 대체로 적지이다. 천일염전에서의 제염법은 해수를 염전 증발지에 입수시키고, 햇빛과 바람 등의 자연의 힘에 의하여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포화함수에서 침전되는 결정체를 얻는 제염법이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생산 시기는 4∼10월이고,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인 5∼6월 사이에 연간 생산량의 약 60%가 생산된다. 또 채염일수는 135∼150일이다.

현황

1965년 우리나라의 염전 면적은 약 2,000㏊로 이 중에서 85%에 해당하는 1,664㏊가 경기만 연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각각 603㏊와 546㏊로서 전국 염전의 58.1%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라남도 · 경기도 · 충청남도 등에 주로 분포하였다.

1985년의 염전 면적은 12,000㏊이었고, 이 중에서 전라남도에 35.4%, 경기도에 28.0%, 충청남도에 12.6%가 분포하여 경기도는 도시화로 인해 크게 줄어들었다. 전라남도의 염전은 광복 이후 민영염전으로 크게 개발된 데에서 주목되며, 섬이 많은 신안군에 60% 이상이 집중되어 있었다.

2005년 우리나라 염전 면적은 11,190㏊이었고, 2009년에는 10,502.8㏊로 전라남도가 가장 넓고, 그 다음이 충청남도, 경기도의 순인데, 경상남도에는 지목만 염전으로 되어 있다.

2010년 현재 천일제염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인천광역시, 경기도의 안산시 · 시흥시 · 화성시, 충청남도의 서산시 · 당진군 · 태안군,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의 부안군 · 고창군, 전라남도의 무안군 · 영광군 · 보성군 · 진도군 · 신안군으로 조합원은 모두 1,268명이고, 이들이 생산한 소금의 양은 22만 2,448톤이다. 전라남북도의 조합원 수는 1,134명이고, 생산량은 전국의 86.6%를, 생산액은 85.2%를 차지하였다.

참고문헌

『통계연보』(각시도, 해당연도)
「전오염 제조방법에 관한 연구」(김일기, 『문화역사지리』3, 1991)
「우리나라 제염업의 전개과정 비고」(노도양박사고희기념문집간행위 편, 『청파노도양박사 고희기념문집』, 명지대학출판부, 1979)
대한염업조합(www.ksalt.or.kr)
『地理學辭典(改訂版)』(日本地誌硏究所編, 二宮書店, 1989)
『朝鮮の經濟事情』(朝鮮總督府, 1938)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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