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 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해풍이 심해 윤선도는 해남읍 연동에서 기거하고 증손인 윤두서(호 恭齋, 1668∼1715)를 살게 했던 건물이다. 윤두서는 조선후기의 문인화가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더불어 조선의 3재(齋)라 불렸다.
이 고택은 해남읍에서 약 20㎞ 거리의 백포 해변가에 있으며 인근 마을에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 10여세대가 살고 있고 전통 한옥들이 옛마을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으로 지은 문간채로 들어가 우측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 48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본채 13칸, 곡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다. 건물의 배치는 뒤로는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고 앞으로는 남쪽이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하여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평면은 ㄷ자형으로 건평은 55.9평이고, 용마루까지의 높이가 약 6m로 지붕이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는데 이는 해변가의 해풍의 영향을 막고자 한 의도라고 생각된다.
막돌쌓기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건물의 바깥쪽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홑처마를 사용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벽체는 판벽과 회벽을 방의 용도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 안채 대청과 서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구성하고 있고 대청 앞쪽에는 쌍여닫이 井자살문을 달았다.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상태로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혀와 굴도리를 받치고 있다.
상량도리 밑의 장혀에 수리 당시의 상량명문이 “구 경술 142년 신미 8월 11일 시 중수 좌묘향유 룡(龜庚戌百四十二年辛未八月十一日時重修坐卯向酉龍)”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연도는 순조 11년(1811)에 해당되나 내림새에 “동치 10년 신미(同治十年辛未, 1871년)”라는 기록이 있어 건축연대가 혼란스럽다. 툇마루 위에는 우미량 형태의 굽은 퇴보를 걸고 초각되지 않은 보아지로 기둥의 사괴를 결구시켜 강한 구조를 하고 있다. 지붕은 본채는 맞배지붕으로 하고 용마루에 작은 합각을 만들었으며 동쪽 광채의 남쪽면 끝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곡간채와 안채사이에 출입통로가 나 있으며 안채의 정중앙에 대청을 두고 있다. 동쪽 익사는 남쪽으로부터 방, 주방, 방, 방, 주방의 순으로 5칸을 배치하고, 서쪽 익사도 5칸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