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때 정배걸(鄭倍傑)에 의하여 개성 남문 밖에 설립되었다. 일명 웅천도(熊川徒)라고도 한다.
정배걸은 1047(문종 1)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일찍부터 자제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최충(崔冲)이 문헌공도(文獻公徒)를 설립한 뒤 남문 밖에 사숙(私塾)을 개설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가 죽은 뒤 국가로부터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과 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추증되었다. 이로써 그의 문도(門徒)들은 이후 홍문공도로 불리게 되었다.
무인집권기인 1205년(희종 1)에는 홍문공도로서 과거에 급제한 임득후(林得候)가 자기 문도의 선성당(宣聖堂)을 팔아먹었다는 죄로 벌을 받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당시에도 홍문공도는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사학교육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12공도와 함께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