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운장(雲章).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이며, 어머니는 승지 조의징(趙儀徵)의 딸이다. 어유봉(魚有鳳)의 문인이며 사위이다.
1728년(영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738년 예문관검열에 천거되었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740년 부수찬을 지내고 이듬해 관동지방의 어사로 나갔다 돌아와서 응교·사간을 지냈으며 1743년 대사간에 올랐다. 이듬해 아들 홍낙명(洪樂命)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하여 전라감사로 있다가 파직당하였으나 그 해 곧 이조참판에 복직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746년 대사헌을 거쳐, 1748년 형조판서가 되어서는 법에 어긋난 장형(杖刑)의 남용을 금지시켰다. 1752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4년 예조판서가 되어 조헌(趙憲)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죽은 자들을 봉안한 창절(彰節)·민민(愍民)의 두 서원을 중수하였으며, 황보 인(皇甫仁) 등에게 증직과 시호가 내려지게 하였고, 사육신과 엄흥도(嚴興道)를 포향하였다.
1755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판돈녕부사를 거쳐, 1759년 판의금부사로서 세손의 사부를 겸하였고, 1769년 병이 심하여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풍산세고』·『정혜공유고(靖惠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