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1593년(선조 26) 연일현감(延日縣監)으로 군공(軍功)이 있었으나 상을 받지 못해 억울함이 있었다. 1597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왜적이 경내에 들어 오자 다른 도로 피란했다가 관아에 돌아 왔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598년(선조 31) 금산군수(錦山郡守)를 거쳐 1601년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3년 북도우후(北道虞候)가 되었으나 비변사에서 나이가 많고 재주가 미열하다 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듬해 영천군수(永川郡守)를 거쳐 1605년 충청수사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수사(忠淸水使)로 무뢰배를 많이 거느려 군관(軍官)이라 칭하여 각 고을, 각 역을 횡행하며 폐단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고, 또 영문(營門)의 군졸을 죄없이 죽게 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1607년 오위장(五衛將)으로 병을 칭탁하고 물러가 병조의 탄핵을 받았다. 1612년(광해군 4) 곡산군수(谷山郡守)가 되었으나 사리에 어둡고 나이도 많은데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폐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영암군수가 되었으나 또 성품이 탐욕스럽고 나이도 늙어 본직에 맞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617년에 행사용(行司勇)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