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황일토(黃一樵), 황건(黃鍵). 함경남도 원산 출신.
1913년 일본으로 가서 도쿄(東京)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입학, 수학하다가 1916년 10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해 국내로 들어오다 부산항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한 뒤 1922년 3월 가출옥하였다.
출감 후 1923년 1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에 가입,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 김좌진(金佐鎭) 밑에서 문우천(文又天)의 후임으로 별동대장(別動隊長)에 임명되어 적극 활동하였다.
중동현(中東縣) 해림조선인민회장(海林朝鮮人民會長) 배두산(裵斗山)이 일본관헌과 중국관헌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핍박하고 신민부의 활동을 방해하므로, 1927년 8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원 이영상(李永祥) · 최진만(崔晋萬) · 채세윤(蔡世允) · 박병찬(朴秉燦) 등과 같이 배두산을 처단하였다. 같은 해 대원들을 데리고 하얼빈에 가서 하얼빈조선인민회를 습격, 해산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이익겸(李益謙)으로부터 군자금 1,500원을 모금하여 무기를 구입하여 본부로 몰래 보낸 뒤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8년 5월 대련법원에서 다른 대원들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일본인 간수를 타살, 1929년 9월 사형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