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양보(陽甫). 진사 황곤재(黃坤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부판관 황부(黃裒)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황이장(黃爾章)이며, 어머니는 김세보(金世輔)의 딸이다.
1717년(숙종 43) 진사가 되고, 1719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자·지평이 되고, 같은해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4년 정언, 1730년(영조 6) 수찬·교리·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의주부윤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병영을 다시 정비하여 방비를 굳건히 하였으며, 그 뒤 우부승지·병조참지·예조참의를 거쳐, 1739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고, 1749년 호조참판에 올라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해서기보균세사(海西畿輔均稅使)가 되어 몸소 배를 타고 다니며 어염(魚鹽)과 배를 살피면서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두 지방의 세입(稅入)이 줄어들어 위로부터 질책을 들었으나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그 뒤 형조참판에 전임하여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751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 청렴하고 신중한 그를 관찰사로 추천하여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함경도에 부임한 그는 경상도의 곡식을 실어다 빈민을 구제하고, 농기구와 소[牛] 등을 나누어주며 농경을 장려하여 북방의 백성들이 떠도는 것을 막고, 이도(吏道)를 쇄신하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북방의 잦은 기근과 유망민(流亡民) 때문에 고심하던 영조는 그를 함경도관찰사로 임명하고는 시름을 놓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