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세조 1) 선무랑(宣務郞)으로 원종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1466년(세조 12) 사역원정(司譯院正)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중국 사람 한아석(韓我石) 등 3명을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내게 하였다.
1468년(세조 14) 사역원정(司譯院正)으로 표류(漂流)하였던 등주위(登州衛)의 기군(旗軍) 쇄경(鎖慶) 등 43명과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요동인(遼東人) 정아승가(丁牙升哥)를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내도록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의 통사(通事)로서 명나라에 갔다 왔고, 이듬해 통사로서 절충장군·행부사직으로 임명되었다. 1469년(성종 즉위) 북경 가는 행차에 당상관(堂上官)으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어전통사(御前通事)가 되었다.
1470년 전지 10결이 하사되었고, 1472년 청승습사(請承襲使)의 통사(通事)로 전지(田地) 10결(結)을 받았다. 1474년 당상관으로서 통사가 되었고, 1476년 행사용(行司勇)으로 어전통사(御前通事)가 되었다.
148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사과(龍驤衛司果)에 제수되었는데, 이에 가선대부가 된 것은 부당하다는 청을 많이 받았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482년 역관(譯官)으로 2품(品)에까지 이렀으며, 사역원의 행사직(行司直)에 올랐다. 1484년 성절사들이 북경에 갈 때에는 당상관인 통사로 따라갔으며,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가 되어 당상관통사로서 북경에 갔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