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세조 1) 12월 송태평(宋太平)·송전수(宋田壽)와 함께 전악으로 임명된 이후 성종 때까지 장악원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1485년(성종 16) 정희왕후(貞喜王后)의 부종묘(祔宗廟) 때 남보다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는 공로로 새끼말 한필을 상으로 받았다.
장악원의 전악들 중에서 음률에 밝았기 때문에 1464년 악학제조(樂學提調) 이윤손(李允孫)을 도와서 조회악(朝會樂)에 관하여 악보를 그려 임금에게 설명한 적도 있다.
성현(成俔)의『용재총화』에 의하면, 악곡의 절주(節奏)에 뛰어났던 그는 세조의 사랑을 받아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른 전악들보다 음악이론에 밝았으므로 1486년『주례(周禮)』의 춘관(春官) 대사악(大司樂)에 관하여 임금에게 상소도 하였다.
그는 장악원의 음악인들과 함께 궁궐 밖에서 풍류활동을 하였는데, 성종 당시 거문고의 명수 이마지(李亇知), 당비파의 도선길(都善吉), 향비파의 송전수, 젓대(笛)의 허오(許吾), 노래의 가홍란(駕鴻鑾)과 어울려 풍류를 즐길 때는 그가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음악의 이론과 실제에 남다른 재주를 지녔기 때문에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아 장악원 전악들에게 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