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기간은 310년부터∼356년까지이다.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角干) 수로(水老, 또는 于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 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다.
기림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여오므로, 아찬(阿飡)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 보내어 화친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 뒤 단교하였고, 왜병이 풍도(風島)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金城)까지 포위하였으나 격퇴시켰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330년에 벽골지(碧骨池 : 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를 개착(開鑿)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병이 처음으로 쳐들어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나라가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것이라고 보아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백제관계기사를 의심하게 한다. 재위 47년에 아들 없이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