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종로구, 서북쪽은 은평구, 남쪽은 마포구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54'~126°58', 북위 37°33'~37°36'이다. 면적은 17.61㎢이고, 인구는 31만 214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행정동(20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다.
북한산의 말단에 위치하며 인왕산, 안산, 백련산 등의 산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산사면을 따라 높고 낮은 형세로, 택지는 홍제천 주변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인왕산(仁王山, 338.2m) · 안산(鞍山, 295.9m) · 백련산(白蓮山, 215.5m)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잔구(殘丘)의 형태로 솟아있다.
지형적 이유로 북쪽 비봉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불광천과 백련산 동쪽을 감싸고 흐르는 홍제천[일명 사천(沙川)]이 있고, 안산과 인왕산 사이를 흘러 내리는 만초천(蔓草川, 일명 욱천)이 있으며 모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2.5°C, 1월 평균기온은 -3.2°C, 8월 평균기온은 25°C이며, 연 강수량은 1,200mm 내외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 · 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 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 · 백제에 대항하였다. 이후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후삼국시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楊州, 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 · 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
그 뒤 무인정권과 몽고침략 등의 정치적 · 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천도론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태조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 · 종묘 · 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 · 서 · 남 · 북 · 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당시 서대문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라고도 함)이 건설되어 이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
서대문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 · 반송방(盤松坊)과 북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에 해당하는 상평방(常平坊) · 연은방(延恩坊) · 연희방(延禧坊) 지역이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부 반석방 반송방과 연희면(延禧面) 지역이 되었다. 1914년에는 서대문구의 행정구역이 축소되면서 용강면(龍江面) · 연희면 · 은평면(恩平面) 지역이 고양군에 속하였고, 현 충정로 일대는 죽첨정(竹忝町) 등이 일제식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동시에 이 일대는 서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15년에는 경성부 직할로 변경되었다. 1936년 고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이곳은 서대문구역소(西大門區役所)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44년 마포구역소가 신설되면서 서대문구 관할구역의 일부가 마포구역소로 넘어갔다.
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서대문구역소도 서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 은평면 11개 리와 연희면 7개 리를 서울에 편입하여 서대문구 은평출장소에 편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53개의 행정동을 두게 되었다. 1962년에는 대신동을 신설하였고, 1964년에는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0년 동명칭과 관할구역을 변경하면서 행정동을 53개에서 41개 동으로 축소하였다.
1973년에는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그리고 마포구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2가, 중림동과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합동, 충정로3가, 만리동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1·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 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여 행정동이 42개 동에서 37개 동으로 축소되었다.
1977년에는 북가좌2동과 증산동을 신설하였고, 1978년에는 영천동을 폐지하였다. 이어 1979년 은평출장소를 없애고 은평구청을 신설하면서 서대문구 중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동, 구파발동, 수색동 등 13개 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어 종래 39개동이 23개 동으로 축소되었다.
1980년에는 홍은4동이 홍은2동으로, 1983년에는 홍제1동 일부가 홍제2동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대현동 일부가 북아현3동으로, 북아현3동 중 일부가 충정로3가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는 현저동이 천연동에 편입됨에 따qhanf 745gh라 서대문구에는 14개 동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1962년 지정)를 비롯하여 월인석보(보물, 1983년 지정),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보물, 1978년 지정),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1978년 지정), 고구려 평양성 석편(보물, 1978년 지정), 기사계첩(보물, 1978년 지정),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보물, 1965년 지정),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7(보물, 1963년 지정),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국보, 2019년 지정) 등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박물관에는 봉업사명 청동북( 보물, 1973년 지정)이 있다.
사적으로는 서울 독립문(사적, 1963년 지정)과 서울 연세대학교 스팀슨관(사적, 1981년 지정),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사적, 1981년 지정), 서울 연세대학교 아펜젤러관(사적, 1981년 지정)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사적, 1988년 지정), 서울 영은문 주초(사적, 1963년 지정)가 있다.
이외 무악산 동봉수대 터(서울특별시 기념물, 1993년 지정), 양호거사비, 화산군 이연 신도비,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보물, 2014년 지정) 등이 있다. 양호거사비는 1993년, 화산군 이연 신도비는 198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홍은동의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때인 747년(경덕왕 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명부전(冥府殿) · 삼성전(三星殿) · 극락보전(極樂寶殿) · 범종각(梵鐘閣) · 원통전(圓通殿) 등이 있고, 절문 앞에는 사령지취락(寺領地聚落)이 형성되어 있다.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때인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 명부전 · 칠성각 등 11동의 건물이 남아있고, 그 중 염불당(念佛堂)은 마포 공덕리에 있던 대원군의 아소정(我笑亭)을 옮겨 온 것이다. 또한 인왕산 선바위 앞에 있는 인왕사(仁王寺), 홍은동의 옥천암(玉泉庵), 봉원동의 용암사(龍岩寺) 등의 사찰이 있다.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왕비녹원삼, 적초의, 청초중단 등의 중요민속문화재들이 있다. 왕비녹원삼, 적초의, 청초중단은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영산재 · 봉산탈춤 · 단청장 등이 있는데, 영산재는 봉원동의 박희덕(朴喜德), 봉산탈춤은 홍제동의 윤옥, 단청장은 봉원동의 이치호(李致虎), 종묘제례악은 홍은동의 이강덕이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은 연희동의 홍동화(洪東和), 은공장은 홍제동의 김원택(金元澤)이 보유자이다. 영산재는 1973년, 봉산탈춤은 1967년, 단청장은 1972년, 종묘제례악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칠장은 1989년, 은공장은 1996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있었다. 초등학교로는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근동의 미동초등학교, 1937년 개교한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 1941년 설립된 북아현동의 북성초등학교 등이 있다.
중 · 고등학교로는 1921년 순종의 하사금을 받아 향상기술학교(向上技術學校)로 출발한 동명여자중학교, 1922년 손창원(孫昌源)의 인창의숙(仁昌義塾)으로 시작한 인창중 · 고등학교, 1928년 경성실업전문학교로 출발한 한성중 · 고등학교, 1940년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으로 출발한 중앙여자중 · 고등학교 등이 있다.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특히 많은 대학이 이 지역에 있어 명실상부한 교육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1885년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설립한 광혜원(廣惠院)에서 비롯된 세브란스의과대학이 1957년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가 들어섰고, 1886년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이 한 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이화학당으로 설립된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1905년 미국 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설립한 감리교신학대학 등이 모두 광복 이전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간호대학 · 명지전문대학 · 명지대학교 · 경기대학교 · 추계예술대학교 등 많은 사립학교들이 있다. 이 외에도 신촌동에 있는 연세대학교 재활학교와 외국인 2세를 위한 연희동의 서울외국인학교와 한성화교중 · 고등학교 등이 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단체로는 창작미술협회, 한국현대판화회, 한국조각공원연구회, 김자경오페라단 등 10여 개 단체가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대현동에 있는 한국전통예술연구보존회는 사물놀이의 대표인 김덕수가 조직하여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보급시키고 있다.
또한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박물관으로는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연세대학교박물관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자연스럽게 동 · 식물과 접하면서 청소년의 교육공간, 주민들의 문화공간,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양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및 보물만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2004년 완공된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약 1만 m²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되어 지구의 탄생과 변화, 생명체의 다양한 모습과 흔적 등이 주제별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인간과 자연관’을 만들어 쥐라기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의 머리뼈를 포함해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골격 등이 전시되어 있고, 무분별한 광산 개발로 인해 파괴된 산림을 보여주는 ‘신음하는 자연’과 한강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전시한 수족관도 눈길을 끈다. 2층 ‘생명진화관’은 태초의 생명이 현재의 인류로 진화한 과정을 전시하는 곳으로 서해안에서 발견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볼 수 있다. 3층 ‘지구환경관’에서는 입체 안경을 끼고 빅뱅부터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을 3차원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동굴관은 벽과 천장이 실제 동굴처럼 꾸며져 있다.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남기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1924년 개관한 신촌동 연세대학교 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학박물관의 효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와 이에 연관된 여러 지역의 문화자원까지도 개발 · 수집 · 연구하고 이를 보존 전시하여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1988년에는 100주년 기념관의 준공으로 이곳에 선사 · 역사 · 미술 · 민속 · 질그릇 · 전각 · 학교사 · 지질 · 동식물 등의 9개 상설전시실과 특별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을 갖춤으로서 대학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종합박물관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대현동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1935년 일제 치하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교수와 학생들이 모은 민속품, 목공품, 도자기 등을 본관 1층에 진열, 전시한 것이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귀중한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1990년 현재의 박물관을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은 지각을 구성하는 암석과 광물을 비롯해 국내에 서식하는 동물과 식물 등을 연구하기 위해 1969년에 설립되었다.
이 외에도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 지역의 스포츠는 구에서 운영하는 체육회 외에 생활체육협의회가 있어 일상생활과 밀접한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포츠시설로는 공원이나 하천부지 혹은 야산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홍은동에는 서대문구립인조잔디축구장, 가좌배수지 배드민턴장과 테니스장, 홍은동 테니스장, 백련약수터, 논골그린공원, 옥척암녹지대, 실락어린이공원이 있다. 그리고 연희동에는 궁둥산 배드민턴장, 연홍약수터, 안산팔각정, 연서어린이공원이 있으며, 홍제동에는 둔치체육시설, 홍제3동 농구장, 불천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외 봉원동의 봉원사배드민턴장, 천연동의 금화테니스장과 동명여중 담장, 북아현동의 금화체력단련장, 창천동의 골목길공원과 바람산공원 등의 각종 스포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특히 정월대보름에 펼쳐지는 지신밟기는 지역의 대학생들과 동네 주민이 한데 어울려 펼쳐지는 행사로 주목받고 있다.
민속놀이로는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새터지신밟기가 있다. 이는 신촌의 옛 이름인 새터에서 인근의 4개 대학, 연세대 · 이화여대 · 서강대 · 홍익대의 풍물패가 주최하고 대학생과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동네 곳곳을 다니며 지난해의 묵은 액을 씻어내고 새해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이 놀이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문화 한마당공연과 윷놀이대회 등도 곁들인다.
또한 봉원사에서는 영산재가 펼쳐지는데, 이 행사는 영산재 인도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부처님의 참 진리를 깨닫고 고통이 없이 즐거움만을 얻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
이 지역에는 무악재가 있어 예로부터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무악재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는 길목이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국가에서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하여 호랑이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던 곳이다. 그 중에 효자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한성부판윤을 지낸 박창선(朴昌先)에게 효성이 매우 지극한 조상이 한 분 있었다고 한다. 선대조 박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한성의 집에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한다. 이 날도 박씨가 아버지의 묘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무악재에 이르자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박씨가 깜짝 놀라 “나는 선친의 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먹으려거든 잡아먹으라.”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호랑이는 박씨 앞으로 다가와서 넙죽이 엎드리더니 등에 타라는 몸짓을 하였다. 박씨는 호랑이 등에 탔고, 박씨를 태운 호랑이는 산봉우리를 몇 개나 넘어 달려 당도한 곳은 박씨의 선친묘 앞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박씨가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호랑이는 다시 박씨에게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씨는 올 때와 같이 호랑이 등에 타고 무악재까지 왔는데, 호랑이는 박씨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박씨가 무악재에 이르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몇 해가 지났고 박씨가 병들어 죽자 그 역시 고양군 신도면 선영에 장사 지냈다. 훗날 집안사람들이 박씨의 묘에 가 보니 묘 앞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대궐에까지 들리자 임금이 감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여 하사금을 내려 묘 옆에 사당을 짓고 효자정문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 부근 마을을 효자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행정명으로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가 남아있으며, 이 밖에도 또 다른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토지의 26.6%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0.4%이다. 대지 41.0%, 학교용지 12.3%, 도로 12.1%, 하천 2.4%, 철도용지 1.2%로 임야와 대지의 비율이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5.5%, 도소매업이 16.2%, 숙박 및 음식업이 16.3%, 운수업 7.5%, 통신업 1.0%, 금융보험업 6.2%, 사업서비스업 6.4%, 교육서비스업 11.1%,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9.5%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체 사업체 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8%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6개 업체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도성을 나와 평안도의 의주로 통하는 큰 도로가 있어 사신들이 홍제원에 머물렀다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왕래하던 곳이었다. 또한 근대에는 경의선이 가설되면서 철로를 통한 왕래가 가능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전차가 왕래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서대문에서 아현동 · 신촌 · 서교동 · 영등포로 통하는 도로, 금화터널을 통해 연희 · 성산 · 화곡동으로 통하는 도로, 무악재를 통해 구파발 · 불광 · 홍제동으로 통하는 의주로 등의 간선도로들로 도심지와의 소통이 매우 편리하며, 도심과 영등포 · 강서 · 은평구 지역을 연결해준다. 또한 고양 · 문산으로 통하는 경의선이 통과한다. 나아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가 개막되면서 도심 순환선인 2호선과 동서를 연결하는 3호선 및 6호선이 모두 서대문지역을 지나면서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
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서대문로터리에서 아현3거리에 이르는 충정로를 비롯하여 홍은동에서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어지는 통일로, 남가좌동 사천교에서 수색동으로 연결되는 수색로, 현저동 독립문에서 금화터널을 지나 영등포구로 연결되는 성산로, 충정로에서 신촌을 지나 동교동으로 이어지는 신천로 등이 주요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외에 창전로, 응암로, 연희로, 가좌로, 동교로, 증가로 등의 간선도로가 있으며, 연희동과 홍제동을 관통하는 내부순환도로가 있다.
철도는 서울역과 문산 간을 연결하는 경의선이 지나고 있으며 이 지역을 거치는 역은 신촌역, 가좌역, 수색역이 있다. 특히 신촌역은 192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래 지금까지 그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2004년 등록문화재(현, 등록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서부역에서 출발하여 신촌역을 거쳐 벽제, 일영, 장흥, 송추 등을 경유하여 의정부역까지 순환하는 서울교외선이 있는데, 이 노선은 경의선의 신촌 · 가좌 · 수색역을 함께 이용하고 있다.
지하철은 2호선과 3호선, 6호선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2호선 구간은 충정로역, 아현역, 이대입구역, 신촌역, 홍대입구역이 있고, 충정로역에서는 5호선을 갈아탈 수 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수서에서 대화까지 39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80년 착공,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여 1985년 10월에 완전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간은 1985년 7월에 개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3호선 구간은 독립문역, 무악재역, 홍제역이 있다. 지하철 6호선은 봉화산역에서 역촌역까지 38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4년에 착공하여 2001년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 지역은 2000년 12월 공사가 완료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6호선 구간은 수색역, 증산역이다.
이 지역의 관광자원으로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연결한 볼거리가 많이 산재해 있다. 특히 사적지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인근의 독립문 영은문주초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다.
1층에는 추모의 장을 만들어 일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 영상시스템을 통해 조감해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며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였다. 2층에는 역사의 장을 만들었는데, 이곳은 나라 사랑에 불타는 선열들의 의거를 통해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와 그 극복을 위한 저항 정신을 계승하고, 온갖 고문과 억압에도 굽힘이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해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하 1층에는 체험의 장을 개설하였는데, 이 장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조건조차 말살되고 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신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곳, 그러나 끝내 꺾이지 않던 그 분들의 용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살아있는 역사체험의 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어 2000년에 착공하여 2004년 문을 연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3층 규모로 인간과 자연 및 지구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 외에도 연세대학교 안에 있는 옛 건물들과 안산 일대, 봉원사 경내와 영산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백련사 경내 등도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다.
신촌역을 중심으로 대학교가 밀집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모이는데 특히 연세대학교 앞과 이화여자대학교 입구에 보다 집중되어 있다. 이화여대 입구에는 여학생들의 통행이 많은 관계로 양장점과 양품점 등의 상가가 발달되어 있고, 신촌로터리 주변에는 음식점과 주점 등이 대표적인 전문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모래내시장을 중심으로 해서는 서민들의 먹거리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연희동 일대에는 화교들을 위한 중국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전통문화 행사로는 음력 새터지신밟기 행사와 봉원사에서 개최되는 영산제가 있다. 특히 영산제는 사전에 예약을 받아 개최되며 우리나라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대 문화행사로는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신촌에서 지역 주민과 대학생이 함께하는 거리축제가 있다. 퇴폐 향락문화를 추방하고 건전한 대학문화의 정착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개최되는 이 축제는 지역문화, 대학문화, 상가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화합의 한마당을 연출한다. 대학촌의 특성에 어울리는 국악한마당, 락공연, 화합의 달리기, 응원제전 등과 외국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계(加佐洞契) 가재율이었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1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가좌동1계 월사동이라 하였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南加佐里)로 변경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6년 서대문구 남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으로는 남가좌1동과 남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수색로 옆의 오래된 모래내시장은 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고, 대학으로는 명지대학교가 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냉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마을 여기저기에서 찬 샘물이 솟아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이판동(李判洞) · 냉동(冷洞)이라 하였다. 1914년 경성부 냉동이 되었고, 1936년 냉천정(冷泉町)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6년에 서대문구 냉천동이 되었으며, 행정업무는 1975년부터 천연동 · 옥천동과 함께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1962년 대현동(大峴洞)의 ‘대’(大)자와 신촌동(新村洞)의 ‘신’(新)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성외)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 · 신촌이었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 · 신촌리의 일부가 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 대현정(大峴町) · 신촌정(新村町), 1946년에는 서대문구 대현동과 신촌동의 일부였다. 1962년에 두 지역을 통합하여 대신동이라 하였다.
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대현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현(大峴)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한성부 북부 연희방(延禧坊, 城外)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 아현4계 마근동(麻根洞)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로 불렸다. 1936년 경성부 대현정(大峴町)이 되었다가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대현동이 되었다. 이곳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등 국가민속문화유산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통예술보존연구회가 있어 김덕수를 중심으로 전통예술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미근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지역에 있던 미동(尾洞)의 ‘미’(尾)자와 근동(芹洞)의 ‘근’(芹)자를 땄는데, 후에 한자가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하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노첨정계 미동 · 수근전계 근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성부 미근동(渼芹洞)이 되었고, 1936년 미근정으로 바꾼 후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서대문구 미근동이 되었고, 행정은 합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극장과 드림시네마(구 화양극장)의 영화관이 있고, 행정기관으로는 경찰청과 서대문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동초등학교가 있다.
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봉원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마을에 위치한 봉원사(奉元寺)란 절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北部) 성외에 속하였고, 1911년 경성부 연희면 봉원동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봉원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봉원정(奉元町)이 되었다가 1946년 서대문구 봉원동이 되었다. 이곳에 안산도시자연공원이 있어 가벼운 산책과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명의 유래가 된 전통사찰인 봉원사와 용암사가 있다.
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이계(加佐洞二契)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2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로 변경되었고, 광복 후 1946년에 서대문구 북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가좌1동과 북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서대문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애오개, 즉 아이고개에서 비롯되었으며, 1914년 아현의 북쪽에 위치하여 아현 북리라 한 것이 시초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1895년에는 한성부 서서(西署) 반송방 아현계 · 북부 연희방 아현1계로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延禧面) 아현북리(阿峴北里)로,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북아현정(北阿峴町)이 되었으며,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북아현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아현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대학으로는 추계예술대학교가 있다.
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신촌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새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신촌’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연희궁계(延禧宮契)에 속하였다가,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2계 신촌으로 칭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신촌리로 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신촌정(新村町), 1943년에는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신촌동이 되었다.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이 있어 학생들과 시민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조선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연희궁(延禧宮 또는 衍禧宮) 터가 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성외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 정자동계 정자동(亭子洞) · 염동1계(廉洞1契) 염동(廉洞) · 세교2계(世橋2契) 궁동(宮洞) · 음월리계(陰月里契) 음월리(陰月里)였다. 1911년 경성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연희정(延禧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연희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연희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있고, 관공서로서 서대문구청, 서대문구민생활체육협의회가 있다.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서울외국인학교가 있으며,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연희삼거리 일대에 화교음식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영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현저동사무소 서쪽 산정에 속칭 ‘악밖골약수터’가 있으며, 이 물을 영천(靈泉)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관전동(館前洞) · 관후동(館後洞) · 옥폭동(玉瀑洞) · 장원정동(壯元亭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1936년 관동정(館洞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영천동이 되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옥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옛날에 옥천암(玉川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옥폭동(玉瀑洞) · 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옥천동이라 하였다. 1936년 옥천정(玉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옥천동으로 되었다.
서대문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창천(滄川)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3계 창천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소속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창천정(滄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창천동으로 하였다. 문화시설로는 신영극장이 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에 천연정(天然亭)이란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석교동(石橋洞) · 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천연동이라 하였다. 1936년 천연정(天然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으로 하였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법정동인 충정로2가와 충정로3가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충정로의 동명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盧僉正契), 조판부사계(曺判府事契) 유동 · 팔각정,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 지하계(池下契) 냉동(冷洞), 차자리계(車子里契) 아현(阿峴) · 형제정(兄弟井)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죽첨정2정목(竹添町2丁目)이라 하였다. 죽첨정은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충정로 부근의 민가에 거주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일제가 정하게 된 것이다.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충정로2가와 3가의 법정동으로 나뉘었다. 관공서로는 충정로3가에 해양수산부가 있고, 언론사로 동아일보사가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합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어물 가운데 조개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조개전’이라 하였고, 이것이 합동(蛤洞)이 된 것이라 전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석방 미전하계(米廛下契) · 합동 한림동(翰林洞), 반송방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芹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합동이라 하였다. 1936년 합정(蛤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이 되었다. 행정기관으로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가 있고, 프랑스대사관이 있다.
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현저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현저동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왕래하던 무악현(毋岳峴)의 밑에 위치한 마을 곧 ‘무악현저’(毋岳峴底)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모화현(慕華峴)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현저동이라 하였다. 1936년 현저정(峴底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하였다.
서대문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의 ‘홍’(弘)자와 은평면의 ‘은’(恩)자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홍은방(성외) 홍제원계 답동(畓洞) · 백련동(白蓮洞) · 외동(外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 때 홍제외리 중에서 홍제천 좌변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9년에 서대문구 홍은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홍은 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동쪽으로 홍체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내부순환로가 지나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체육시설로 서대문문화체육회관, 전통사찰로 백련사가 있고, 대학으로는 명지전문대학이 있으며 이외에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서대문구의 동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유숙하던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은방(延恩坊, 성외) 홍제원계 내동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홍제정(弘濟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소속되었으며, 1949년에 서대문구 홍제동이 되었다. 서쪽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내부순환로가 지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