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태극선
태극선
의생활
물품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게 하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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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게 하는 기구.
개설

가는 대오리로 살을 만들어 넓적하게 벌려서 그 위에 종이나 헝겊을 바른 것이다. 부채란 ‘부치는 채’라는 말인데, 이 말이 줄어서 ‘부채’가 된 것이다. 인류가 맨 처음 부채를 사용한 것은 원시시대부터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있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뭇잎이었을 것이다.

그것으로써 무더위에 바람을 일으켜 서늘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원시적인 모습은 20세기의 문명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프리카 산간 지대의 원주민들과 동남아시아의 산간 지대 원주민들의 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부채를 한자어로는 ‘선자(扇子)’라고 한다.

고려 때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우리말의 부채를 표기하여 “선왈부채(扇曰孛采)”라 하였고, 15세기 조선 성종 때의 『두시언해』에는 “고추수화선(高秋收畫扇)”을 “노○ ᄀᆞᅀᆞᆯᄒᆡ 그륜 부채를 ᄀᆞ초고”라고 번역하였으며, 같은 시대에 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도 “타선자(打扇子)”를 “부채질 ᄒᆞ였노라”로 번역하였다.

또 16세기 조선 중종 때 사람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와 한호(韓濩)의 『천자문』에도 ‘선(扇)’을 ‘부체 션’이라 하였음을 보아 고려 및 조선시대에도 부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인류가 언제부터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중국 진(晉)나라 때의 학자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註)』에 보면 중국의 순(舜)임금이 오명선(五明扇)을 만들었다 하였고, 그 이유로서는 순임금이 요(堯)임금의 선위(禪位)를 받아 임금이 된 뒤, 현인을 구하여 문견을 넓히고자 오명선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한(漢)나라 때와 당나라 때에는 착한 사람을 추거하는 사람에게 주는 기념물로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송나라 때의 학자 고승(高丞)의 『사물기원(事物紀原)』 황제내전(皇帝內傳)에 오명선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오명선이라고 하는 뜻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리고 초량선(招凉扇)은 주나라 무왕이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서양학자들의 통설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부채는 일본의 여주(女主)인 신공왕후(神功王后)가 박쥐의 날개를 보고 부채를 만들었다 하였다.

또 회선(檜扇)이라는 부채가 있는데, 이것은 회나무 껍질 25개를 엮어 만든 것으로서 흰 종이로 바르고 그 위에 등꽃모양을 놓아 띠같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 학자 이마무라 토모[今村鞆]는 「일본에 있어서 창제되었던 부채」라는 글에서 신공왕후의 부채 창제설을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부인하였다.

일본 부채는 본래 회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종이 부채는 그 뒤 회선에서 전작(轉作)된 것이라 하였다. 이 회선은 접는 부채로서 오늘날 일본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것도 적지 않다. 회선의 창제 연대에 대하여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으므로 불분명하나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초기에는 아직 부채가 발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부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조에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 해 8월에 일길찬(一吉飡) 민극(閔郤)을 파견하여 이를 하례하고 드디어는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화살[竹箭]을 보냈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는 10세기(고려 초)에 이미 부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공작선을 보냈다는 이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도 보인다. 공작선은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도 공작의 깃으로 둥근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견훤이 하례품으로 주었던 공작선도 둥근 부채(방구부채)였다고 보인다.

접는 부채(접부채)가 우리나라에 있은 기록은 송나라 사람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 고려사신 최사훈(崔思訓)이 1076년 신종 희녕 병진년(문종 30)에 접는 부채[摺疊扇]를 사용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접는부채가 11세기 중엽에는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방구 부채는 중국이 그 역사가 오래고, 접는 부채는 일본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접는 부채는 일본 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사람이 그를 모방하여 우리의 재료로써 우리 식대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국교품과 부채

우리나라 부채는 국교품(國交品)으로서 일찍이 사절편에 중국을 비롯하여 몽고·일본 등 여러 나라에 진출되었다. 이에 대하여서는 『고려사』·『고려도경(高麗圖經)』·『조선왕조실록』·『임하필기(林下筆記)』·『열하일기(熱河日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지봉유설(芝峰類說)』·『주영편(晝永編)』·『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계림지(鷄林志)』 등에 보인다.

또 『화계(畫繼)』·『춘풍당수필(春風堂隨筆)』·『남산묵담(南山墨談)』·『장해동집(張海東集)』 등 여러 문헌에도 보인다. 『고려사』에는 1232년(고종 19) 4월에 상장군 조숙창(趙叔昌) 등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헌물(獻物) 중에 화입선(畫入扇)을 보낸 일이 있다. 『장해동집』에 의하면 중국에는 옛날에 접부채가 없었다 하였다.

왕추간(王秋磵)의 기사를 들어 원나라 초에 우리나라 사신이 접부채를 지녔는데, 명나라 영락초(조선 태종 때)에 중국에서도 처음으로 이를 지니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유원경(劉元卿)의 『현혁편(賢奕編)』에는 접부채는 일명 살선(撒扇)이라고 하니, 살선은 영락연간에 조선국이 살선을 진상한 데서 비롯되었다.

명나라 태조가 그 접어지고 펴지고 하는 것을 좋아하여 상방(尙方)에 명하여 이를 모방하여 만들어 살선 또는 고려선(高麗扇)이라 하였다 한다. 『봉창속록(蓬窓續錄)』에는 접부채를 영락연간에 조선에서 진상하므로 나라 안에 성히 사용되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은 명나라 사람 육심(陸深)의 『춘풍당수필』과 방이지(方以智)의 『통아(通雅)』 등에도 보인다.

청나라 사람 고사기(高士奇)의 『천록식여(天祿識餘)』에는 청나라 때에 와서는 우리나라의 접부채가 크게 유행되어 중국의 방구 부채[團扇]는 그 당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0년 4월에 왕은 명나라 사신에게 흰 접부채 100자루를 주었고, 세종 2년 4월에도 명나라 사신에게 흰 접부채 100자루를 주었다고 한다.

세종 8년 5월에는 명나라 사신이 부채를 구하므로 왕은 방구부채 10자루, 접부채 88자루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 단종 즉위년(1452) 11월에 명나라 사신 김유(金宥)에게 접부채 50자루를 회사품(回賜品)으로 보냈고, 세조 14년 4월에는 왕이 명나라 사신에게 접부채 103자루와 깃부채[羽扇]를 주었다.

광해군 14년(1622) 4월에도 명나라 사신 및 수행원들에게 흰 부채[白扇] 224자루, 기름먹인 부채[油扇] 1,830자루와 흰 부채 1,800자루, 기름먹인 부채 9,000자루를 여러 차례에 걸쳐 증답(贈答)의 명목으로 보냈다는 것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접부채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비롯하여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국교품으로서 많은 수량이 진출되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사신 세 사람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국교품으로서 부채를 가져갔다. 선물처와 수량을 적어보면, 대마도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와 대첩선(大貼扇) 3자루, 대판(大阪)·경도(京都)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 관계로는 부채 60자루, 백첩선(白貼扇) 8자루, 첩선(貼扇) 36자루이다.

이와 같이 일본에도 상당한 수량의 부채가 우리나라에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는 우리나라의 부채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니 그들의 ‘조선골선(朝鮮骨扇)’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국교품으로서의 부채가 우리나라에서 중국·일본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부채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3년(1421) 7월에 부채 20자루가 다이라노[平滿景]로부터, 1426년에는 접부채 100자루가 이시시로관사[石城管事] 쇼카네[宗金]로부터 세종에게 보내왔다.

1434년에는 갑선(匣扇) 1백자루가 아시카가[足利義敎]로부터, 1440년 12월에는 채화선(彩花扇) 100자루를 역시 아시카가가 세종에게 보내왔고, 성종 5년(1474)에는 부채 100자루를 아시카가[足利義政]가, 1475년 8월에는 부채 1백자루가 아시카가[足利義尙]로부터 성종에게 보내왔다.

선조 40년(1607)에는 부채 100자루가 도쿠가와[德川秀忠]로부터 선조에게 보내왔다. 그리고 인조 14년(1636) 3월에는 금은선(金銀扇) 200자루를 일본의 봉행(奉行)으로부터 조선 사신에게 보내왔다.

또,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윤4월조에는 왜선(倭扇) 400자루를 전라도로부터 봉진(封進)하게 하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와 같이 일본 부채 또한 상당한 수량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것이다.

종류

부채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방구 부채요, 또 하나는 접부채이다. 방구 부채란 부채살에 깁[紗]이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의 부채로, 일명 둥근 부채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단선(團扇) 또는 원선(圓扇)이라고 한다. 접부채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다.

접는 부채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접선(摺扇) 또는 접첩선(摺疊扇)이라고 한다. 방구 부채에는 오엽선(梧葉扇)·연엽선(蓮葉扇)·파초선(芭蕉扇)·태극선(太極扇)·아선(兒扇)·오색선(五色扇)·까치선·진주선(眞珠扇)·공작선(孔雀扇)·청선(靑扇)·홍선(紅扇)·백우선(白羽扇)·팔덕선(八德扇)·세미선(細尾扇)·미선(尾扇)·송선(松扇)·대원선(大圓扇) 등이 있다.

접부채에는 백선(白扇, 白貼扇)·칠선(漆扇)·유선(油扇)·복선(服扇)·승두선(僧頭扇)·어두선(魚頭扇)·사두선(蛇頭扇)·반죽선(班竹扇)·외각선(外角扇)·내각선(內角扇)·삼대선(三臺扇)·이대선(二臺扇)·단목선(丹木扇)·채각선(彩角扇)·곡두선(曲頭扇)·소각선(素角扇)·광변선(廣邊扇)·협변선(狹邊扇)·유환선(有環扇)·무환선(無環扇) 등이 있다.

또 합죽선(合竹扇)·단절선(短節扇)·화선(花扇)·윤선(輪扇)·오골선(吳骨扇)·표정선(杓庭扇)·무선(舞扇)·무당부채 등도 있다. 이와 같은 부채의 종류와 명칭은 방구 부채의 경우에는 부채살의 모양과 부채 바탕의 꾸밈에 따라 명칭이 붙은 것이고, 접부채의 경우에는 부채살의 수와 부채꼭지의 모양과 부속품 및 부채 바탕의 꾸밈에 따라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접부채 중에는 부채살이 50살·40살·30살 되는 것이 있다. 무당부채 가운데에는 선면에 해와 달을 그린 일월선(日月扇)이 있고, 세 부처를 그린 삼불선(三佛扇)이 있으며, 네 선녀를 그린 사선(四仙)부채, 여덟 선녀를 그린 팔선녀(八仙女)부채도 있다.

방구 부채와 접부채 외에 우리나라 부채에는 별선(別扇)이라는 특별한 부채가 있다. 즉, 보통 부채보다 특별히 잘 만든 부채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전혀 볼 수 없고 문헌상에만 나타나는데, 고려시대의 송선도 별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즉, 부드러운 솔가지를 엮어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동안 유행되었던 윤선 또한 일반 부채와는 그 형태가 다른 특이한 부채로서, 댓살의 폭이 넓고 큰 것으로서 자루가 달려 있어, 펼치면 마치 우산같이 동그랗게 도는 부채이다. 조선시대의 별선은 지방에 따라, 수요자의 요청에 따라, 또는 특출한 창의력을 가진 선장(扇匠)에 따라 간혹 나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극히 소량인 데다가 일시적이었을 뿐,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여 희귀한 물건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접부채에는 50살의 부채와 같은 것은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러한 부채도 귀한 것으로서 별선이라 하였다. 즉,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접선의 풀이에는 부채살이 많음으로써 귀한 것으로 친다 하고, 이것이 즉 ‘50살 별선’이라고 함을 보아 알 수 있다.

별선 중에서 문헌상에 그 명칭의 유래가 분명한 것 몇 가지를 들어보면, ① 오골선은 조선시대에 전라도 남원의 수령이었던 오재문(吳在文)이 만든 것이다. 부채살을 아래의 부골(附骨)에 붙여서 구부러뜨려 만든 것인데, 그 공작에 손을 많이 써야 하였다.

이 부채는 서울의 권세 있는 귀인들에게 단오 때 선물로 보내는 것으로서 선장들로부터 무상으로 징수하는 것이므로, 선장들은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이를 ‘오골선’이라 한 것은 오(吳)가놈의 뼈라는 원망의 뜻으로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② 표정선은 조선 말기에 외척으로서 세도가 있던 민태호(閔台鎬)가 고안한 것이다. 이는 접부채로서 민씨의 호로써 부채의 이름을 삼았다. 모양은 종전의 부채보다 조금 작으나 우아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이 부채는 전해오지 않고, 그 이름마저 아는 이가 드물게 되었다.

③ 옥선은 조선시대 전라도 옥과현(玉果縣)의 선장 김희옥(金喜玉)이 만든 부채이다. 이 부채는 참으로 묘하고 아름다웠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한 자루를 얻으면 소중하게 여기기를 구슬같이 하여 ‘옥선’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조선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기록되어 있다.

④ 팔덕선은 『임하필기』에 황해도의 재령·신천 등지에서 풀잎으로써 엮어 만든 둥근 부채이다. 주로 농부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팔덕이란 바람 맑은 덕, 습기를 제거하는 덕, 깔고 자는 덕, 값이 싼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는 덕, 햇볕을 가리는 덕, 독을 덮는 덕의 여덟 가지 덕을 말한 것이다.

팔덕선은 부들부채라고 하여 부들[香蒲]의 줄기를 결여 만든 방구부채인데, 황해도지방뿐 아니라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는 지금도 농민들 사이에는 많이 만들어 쓴다. 요즈음은 팔덕에 대한 해설도 시대가 진전함에 따라 그 용도가 넓어졌음인지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즉, 하나는 바람을 일으키고, 둘은 햇볕을 가리기도 하고, 셋은 야외에서 깔고 앉기도 하고, 넷은 야외작업 때에 음식을 담아 이고, 다섯은 비가 올 때는 잠시 머리를 가리기도 하고, 여섯은 물건을 놓을 때 받침으로도 사용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선(紗扇)·포선(布扇)·피선(皮扇) 등 부채 선자가 든 물명이 있으니, 글자만 보아서는 부채의 이름 같으나 실상은 부채가 아닌 기물의 명칭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조선 말기까지 주로 양반들의 낯가리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선은 옛날 양반 계급들이 길을 갈 때나 또는 말을 탈 때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는 혼인 때 신랑이 신부집에 말을 타고 갈 때, 사선을 휴대하여 그것으로써 얼굴을 가리고 가는 풍습이 있어서 사선을 일명 ‘낭선(郎扇)’이 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사선은 두 막대기 사이에 깁을 댄 것이다. 포선은 일명 ‘상선(喪扇)’이라고도 하고 ‘복선(服扇)’이라고도 한다.

양반들의 장례 때 상복을 입는 이가 휴대하여 사용하였고, 또 상중에 있는 이가 상복을 입고 외출할 때에도 휴대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상중에 있는 몸으로 근신하고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서이다.

포선은 두 막대기 사이에 삼베를 이은 것이다. 피선은 일명 ‘모선(毛扇)’·‘난선(暖扇)’·‘초선(貂扇)’이라고도 하여, 얼굴도 가리고 방한용으로도 사용하였다.

그 만듦새는 양쪽 막대기를 누런 담비털로 싸서 대나무 마디의 모양으로 만드는데, 두 막대기 사이를 검은 비단 한 폭으로 잇는다. 간혹 수달피로 막대기를 싸기도 한다. 그것으로 손을 따뜻하게 하고 얼굴을 보호한다. 봄·가을에는 비단 한 폭으로 먼지를 막게 하고, 노루가죽으로 기둥을 싸기도 한다.

‘선(扇)’자가 든 물명에는 이 밖에도 의장구(儀裝具)로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용선(龍扇)·미선(尾扇)·봉선(鳳扇)·작선(雀扇)·수자선(壽字扇)·수화선(繡花扇)·황단용단선(黃單龍團扇)·치미선(雉尾扇)·공작선(孔雀扇)·청화방선(靑花方扇)·연화작선(蓮花雀扇)·청선(靑扇) 등이 그것이다.

부채와 풍속

단오와 부채

우리나라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라.”하는 말이 있다. 단오가 가까워오면 곧 여름철이 되므로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단오 선물로서 선사를 하고, 또 동지가 가까워오면 새해 책력으로써 선물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는 해마다 공조에서 단오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였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전라도와 경상도관찰사 및 절도사의 외관(外官)도 각기 그곳 특산품으로서 부채를 궁중에 진상하고, 또 조관(朝官)과 친지에게 선사하였다. 그리고 부채를 생산하는 각 고을의 수령들도 이와 같이 궁중에 진상하고 서울 각처에 선사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 부채 중에서도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쳐주었다. 『열양세시기』에도 공조와 전라도·경상도 두 감영과 통제영(統制營)에서는 단오 때가 되면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였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이를 시종관(侍從官) 이상 세 영(營)에서 모두 예에 따라 차이가 있게 나누어주고, 부채를 얻은 사람은 다시 그것을 자기의 친척·친구·묘지기·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경도잡지(京都雜志)』와 『동국세시기』에도 나타나 있다. 단오진선(端午進扇)과 단오사선(端午賜扇)에 대하여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사가 수없이 나타난다. 그 중의 몇몇 기록을 보면, 광해군 8년 5월조에는 왕이 명하여 단오진상의 유선(油扇)을 경상·전라 양 감사에게 보내오게 한다 하였다.

광해군 10년 4월조에는 왕이 양 감사에게 유선 각 500자루와 칠선(漆扇) 각 100자루, 경상 좌우 병사에게 각 300자루, 전라병사에게 400자루를 5월 안으로 속히 보내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단오진선이란 주로 단오날 왕이 하사하기 위하여 부채의 명산지인 경상·전라의 방백들에게 명하여 궁중에 바치는 부채를 말하는 것이다.

선조 37년 5월조에는 단오절에 승정원·홍문관 실록교정청(實錄校正廳)의 관원에게 특히 음식과 부채를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인조 15년 5월조에는 왕이 안주의 군병들에게 부채 370자루를 나누어주었다고 하였다. 이른바 하사하는 부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단오진선은 관가의 명에 의하여 하는 것이어서 당시 민간에 많은 피해룰 주었던 모양이다.

노동의 대가도 없으며, 대밭이 점점 쇠진하여갔으므로 죽제품 민구(民具)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여가던 백성들에게는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실정을 안 관원 중에는 단오진선의 피해를 왕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즉 정조 18년 11월조에는 경상·전라 암행어사는 흥양현(興陽懸) 단오진선의 피해를 말하였다.

그 때문에 대밭이 쇠진해감을 장계하였고, 좌의정이 왕에게 아뢰기를 부채만드는 지방의 도신(道臣)을 엄칙하여 부채의 제작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조 22년 9월조에는 능주목사(綾州牧使)가 절선(節扇)의 폐단을 글로 적어 올려 앞으로는 적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오진선과 단오사선은 오랜 관습이라 조선 말기까지 줄곧 계속하여왔던 것인데, 고종은 한때 남도백성들의 기근을 생각하고 단오진선을 정지하기도 하였다. 단오절에 부채를 하사하고 진선하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종 및 세종 양대 때부터 이러한 풍속이 있었으니 이에 대하여서는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5월조와 세종 8년 5월조에 보인다.

부채에 글씨·그림을 써넣는 풍속

우리 민간에서 흔히 부채를 선사 받은 이는 그 부채에다 금강산의 만물상을 그려 가지기도 하였다. 또 근속(近俗)에는 버들가지·복숭아꽃·나비·벌·백로·부용 등을 그려 가지기를 좋아하며, 또 유명한 이의 시문을 써서 가지기도 한다. 이규경(李圭景)의 「동국선제변증설 」에 의하면, 당나라 때에는 방구 부채에 글씨를 썼는데 주로 시구였다.

그림은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접부채에 그렸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풍속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사』에는 고종 19년 4월에 “상장군 조숙창(趙叔昌) 등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에 헌물 중에 우리의 화입선(畫入扇)을 보낸 일이 있다.” 하였으니 고려 중엽에 화입선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경도잡지』에는 “단오에 부채를 서울 관원에게 나누어주는데, 부채 면에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 하였음을 보아, 그러한 풍습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채에 이름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그려 받고, 또 이름 있는 명필가의 글씨를 써 받아 가지는 풍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겠으나,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잘 그려주지 않았다.

또 그것은 뒷날 하나의 친구간의 정표가 되기도 하고 기념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난날의 유명한 이들의 그림부채나 글씨부채를 볼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이 친구들에게 그려주고, 또 써주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것으로, 주로 유명한 화가나 명필가들의 것이 대부분이다.

뒷날 사람들이 그 그림과 글씨의 우수함을 알고 아낀 나머지 부채살에서 선지(扇紙)만을 따로 떼내어 액자나 족자로 표구하여 애장 보존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니, 이는 부채라기보다는 하나의 미술품으로서 진중되어오는 것이다.

부채 사용의 풍속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방구 부채는 황색을, 접부채는 백색과 흑색 두 빛깔의 것과 기름먹인 것을 좋아한다. 방구 부채는 대개 집안에서 남녀가 다같이 사용하였고, 남자가 외출을 할 때는 접부채를 가지고 나가고 방구 부채는 가지고 나가지 않으며, 여러 빛깔이 있는 색선(色扇)은 젊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사용한다.

그리고 무당이나 기생을 제외한 일반 부녀자들은 외출할 때 부채를 휴대하지 않으니, 이는 조선 태종 때 부녀자의 부채휴대외출을 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도 1910년 이후로는 점차 사라져가서 오늘날은 그 유풍이 시골 옛 노인들 사이에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채는 여름철에 바람을 일게 하는 도구로서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특히 숯불을 피울 때나 숯불을 사용하는 다리미질을 할 때는 연중 어느 때나 사용하며, 중국인들이 고려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쥐고 다닌다고 그 풍속을 기록하고 있듯이 조선시대 양반들은 겨울철에도 휴대하는 풍속이 있었다. 혼례 때에는 얼굴의 눈 아래 하반부를 가리기 위한 체면용으로서 어느 계절이고 부채를 사용하였다.

신랑은 청색, 신부는 홍색을 사용하였으며, 상중에 있는 상주되는 이는 부채에 낙죽(烙竹)도 하지 않는 흰 부채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무당들이 춤을 출 때와 창우(倡優)들이 무대에서 소리를 할 때, 그리고 재인(才人)들이 줄 위에서 줄을 탈 때에는 언제나 부채를 사용하며, 또한 가면극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중과 양반들이 사용하고 있다.

부채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었으므로 부채에 관한 일화도 많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왜적이 쳐들어오자 고군분투,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는데 죽기 직전에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나서 부친에게 보낼 글을 흰 부채에다 사언절구로 써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조 때 시인인 임제(林悌)는 사랑하는 기생에게 칠언절구의 시를 흰 부채에다 써보내어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朴元宗)은 부채를 휘두르며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신과 같았다는 일화가 있으며, 성종 때 이빙(李砯)의 동생되는 이가 성종으로부터 흰 부채를 하사받은 것이 여러 사람의 시기를 사서 한평생 현달할 수 없었던 일화도 있다.

조선시대 천한 신분의 여자가 그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양반 부녀자의 행세를 하다가 그것이 탄로되어 장형(杖刑)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종 때 글씨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가 부채에 글씨를 써서 부채장사에게 이득을 보게 한 이야기도 있다.

김정희가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전에 못 보던 부채짐이 놓여져 있으므로 청지기에게 물었더니, 부채 장사가 부채를 팔러왔다가 해가 저물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므로 객방에 묶고 있다 하므로, 그런가 하고 사랑채로 들어가 앉았는데, 그날 따라 심심도 한데다가 조금 전 보았던 부채에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청지기더러 그 부채짐을 마루로 들여놓게 하고는 부채를 한아름 꺼내어 쓰고 싶은 글귀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꺼내어온 부채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쓰고 말았다. 이튿날 부채장수가 떠나려고 부채짐을 풀어 조사해보니, 부채에 주인 영감이 글씨를 써놓았으므로 부채장수는 물건을 못쓰게 만들어놓았다 하고 탄식이 대단하였다.

이를 본 김정희는 말하기를 이 부채를 팔 때에 “추사선생이 쓴 글씨부채라 하고, 값을 몇 곱절 내라고 하면 너도나도 다 사갈 것이니, 자네 나가서 팔아보게나.”하자, 그 부채장수는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거리로 나가 일러주는 대로 하였다.

그랬더니 그 부채는 순식간에 다 팔리고 말았다. 부채장수는 김정희를 찾아가서 앞으로도 글씨 써주기를 간청하였으나, 김정희는 “그러한 것은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을 해서는 안되네.”하고 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채공예

부채제조공정

부채제조공정 부채를 만들려면 먼저 대[竹]를 골라야 하는데, 대는 음력 7월 15일 전후의 1개월 동안과 9월 그믐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동안에 벤 대를 사용한다. 이 시기의 대는 벌레가 슬지 않고 또 질이 좋기 때문이다. 잘 말린 대를 길이로 끊어서 숯불에 구어 진을 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빛을 곱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로 목살과 끝살을 깎는다. 목살은 대껍질만 남겨놓고 깎아 부레풀로 맞붙여 합죽(合竹)을 한다. 합죽을 끝내면 낫칼로 곱게 질을 내고 그 다음에는 갓대를 만든다. 처음 쇠뼈를 양잿물에 넣고 삶아 표백을 한 다음, 쇠뼈를 부레풀로 붙이고 또 단절(短節)을 붙인다. 그 뒤 가피(加皮)하고 등을 얹는데, 흰 부골(附骨)에는 까만 수침목(水沈木)을 받친다.

그리고는 끝이 뾰죽한 인두로 속살에 송낙도 놓고, 박쥐·점박이 등 여러 가지 무늬를 낙죽(烙竹)한다. 낙죽을 끝내면 속살과 갓대의 살 하나 하나를 칼로 다듬어 윤을 내고, 그런 다음에 직선인 갓대를 구부정하게 휜다. 이것을 변을 잡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부챗살에 맞도록 종이를 접은 다음, 살에 종이를 풀로 붙인다.

그 뒤 목살을 동여서 사북을 하는데, 사북은 은이나 백동으로 한다. 칠부채나 기름부채를 만들 경우에는 선면(扇面)에 칠을 입히고 들기름을 먹이어 3일 동안을 말린다. 이상이 부채를 만드는 공정이나, 부채가 되기까지에는 약 3개월 이상의 시일이 걸리며, 대체로 분업으로 세분되어 이루어진다.

부채 제조의 변천

역사가 오랜 우리나라 부채는 시속(時俗)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다. 접부채만 하더라도 큰 것을 좋아하던 것이 점점 작은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빛깔도 한동안 방구 부채에 흰색과 검은색을 비롯하여 청색·홍색·황색·녹색·자주색의 부채를 좋아하였으나, 통속적으로는 흰색·검은색·황색칠을 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접부채는 기름을 칠한 유선을 좋아하였고, 요즈음은 흰색 부채를 좋아하는가 하면 그림 부채를 또한 좋아하기도 한다. 조선 정조 때 사람 박일원(朴一源)의 『추관지(秋官志)』 사치조(奢侈條)에는, 정조 때에는 칠선과 유선 두 가지의 부채가 있었는데 수십년 동안에 그 만드는 것이 기이하고 그 모양이 교묘하여 해마다 더하였다고 되어 있어 부채 제조의 변천을 알 수 있다.

『임하필기』 각양선자조(各樣扇子條)에는 영조 때의 부채 가운데에 승두선(僧頭扇)이라는 부채가 있었는데, 대개 그 살에 옻칠을 하고 두꺼운 종이로 붙인 뒤 파란 줄로 선을 둘렀으며, 길이가 한자 남짓하며, 그 모양이 사치스럽고도 견고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부채도 시속에 따라 그 모양이 새로 만들어지고, 얼마간 계속되다가는 폐하여 없어지고 하여, 변천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에 의하면 경공장(京工匠)에는 첩선장(貼扇匠) 네 사람, 전라도에는 선자장(扇子匠) 두 사람, 경상도에는 선자장 여섯 사람을 두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서보다 경상도에서 부채 만드는 일이 성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부채는 그 외양이나 품질에 있어서 전라도의 남평과 전주에서 나오는 것을 제일로 쳐주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팔로이병(八路利病) 변증설 중에는 감영과 병영에서 만든 부채 외에 남평의 부채를 제일로 친다 하였고, 『동국세시기』 5월 단오조에도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그 지방에서는 적지않은 부채가 생산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 품질에 있어서는 예전 것만 못하다.

부채장식품

접부채에는 사북에 백동(白銅), 또는 은으로 된 조그마한 고리를 단 것과 달지 않은 것이 있는데, 대개는 고리를 단 것이 많다. 이러한 부채를 옛날 사람들은 유환선(有環扇)이라 하였는데, 선추(扇墜)를 꿴 끈을 매어 달기 위하여 고리를 달아놓은 것이다. 선추는 부채고리에 매다는 장식품이다.

「동국선제변증설(東國扇制辨證說)」에는 선추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俎)』에는 선추가 당대(唐代) 이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송나라 고종이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할 때 장순왕(張循王)의 부채를 보았는데 그 부채에 선추가 있었다 하여, 송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에 이미 있었음을 보아 그 사용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나, 아마도 명나라로부터 전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선추는 조선시대에 주로 양반들이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도 벼슬아치만 달고 일반 선비와 서민은 달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추로서는 비취 또는 호박이 많이 사용되었고 나무·뿔, 또는 금속물도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2년 2월조에는 왕은 공조에 명하여 이제부터는 단오진상의 접부채에는 금·은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기사가 있다. 이는 부채고리 또는 선추에 사용되는 금·은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24년 10월조에는 당시 부채 한 자루 값이 목면 400필이라 하였으니 부채가 대단한 사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부채 자체의 값보다도 그 부채에 달린 선추의 장식품값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그 장식에 금·은·주옥 등을 사용하여 실용품 또는 기완품(奇玩品)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재의 뜻을 가졌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선추가 발달되었던 까닭은 이러한 데 있었던 것 같다.

원래 부채고리에 갈색 명주끈을 매달게 된 동기는 부채의 분실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이것도 점차 하나의 사치품으로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금속·보석류 외에도 옥추단(玉樞丹)을 끈에 꿰어 선추로 사용하였으니, 토사나 곽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깎거나 또는 물에 갈아 마시는 휴대용 구급약으로도 사용되었다.

선추는 보통 직경 3∼4㎝ 둘레로 다듬어 양면에 십장생(十長生)을 조각하는데, 조각에는 인각(印刻)과 통각 두 가지가 있다. 인각은 구멍을 내지 않게 새기는 것이고, 통각은 구멍을 내어 새기는 것이다. 십장생 중에서도 송학(松鶴)을 제일로 치니, 이는 송학 조각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었다.

부채 제조의 현황

부채 제조의 현황 우리나라 부채 제조업자들은 민족 항일기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 즉 우리나라 부채보다 값이 싸고 가볍고 다소 편리한 일본 부채가 많이 들어와 판을 치자 자연히 그것을 쓰는 이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 부채 제조업자들은 점차 쇠퇴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일본부채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부채의 수요량은 부쩍 늘어나 우리나라 부채업계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접부채는 현재 주로 전주에서 만든 것이 전국 소모량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고, 익산에서도 약간 만들어지고 있다. 방구 부채는 남원을 비롯하여 전주·강경·밀양·서울 등지에서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80%는 남원에서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주에서 생산하는 접부채는 연평균 2만 자루 정도이고, 이에 종사하는 기술자는 15명 정도로서 한 사람이 평균 2천 자루 정도를 만든다. 남원에서 생산되는 방구 부채는 연평균 400만 자루 정도이며, 한 가호당 생산량은 3천 자루에서 1만 자루씩인데, 이것이 중개상을 거쳐 전국시장으로 나가 팔리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선풍기와 에어컨디셔너가 보급됨에 따라 가정에서의 부채의 수요량은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부채가 홍보용으로 제작되어 유통되는 유행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 방법으로 제작된 부채는 생활용품보다는 관광공예품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어 특산물로서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방구 부채는 형태와 표상이 특이한 것이 많으니 태극선·파초선·연엽선·오엽선(梧葉扇)·인자(仁者)·오색선 등 그 종류가 다채롭고, 접부채에는 윤선(輪扇) 같은 것도 있어 외국 관광객들은 그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

우리나라 부채의 특질은 재료가 대와 한지가 주가 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선면에다 옻칠을 하거나 들기름을 먹인 것은 오래가므로 다년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려 80여종이나 되어 그 양태가 몹시 다채로운 것도 중요한 특질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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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려도경(高麗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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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경도잡지(京都雜志)』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한국부채의 연구』(최상수, 대성문화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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