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담양 일대는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까지 옛 무진주(武珍州)에 속하며 일찍부터 행정중심지였다. 지리적으로 남원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순창, 동쪽으로는 곡성과 근접한 교통의 요지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 지리적 배경을 반영하듯 다수의 사찰과 불교유적이 몰려 있다. 민간에 구전되어 오는 얘기에 따르면, 이 석불입상은 미륵불로 불려왔으며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목숨을 잃은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구의 석불을 조성하여 세웠다고 한다. 현재 오룡리의 옛 절터로 추정되는 도로변에 서 있다.
전체 높이 345cm의 대형 석불로, 눈과 코의 일부 손상된 부분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며, 왼손 역시 파손 부분을 보수하였다.
석불은 장방형의 광배와 불신(佛身)을 한 돌에 새겼는데, 단구형의 어색한 비례에 조각 기법 또한 세련미가 다소 떨어지나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어 거의 원각상(圓刻像)처럼 보인다.
민머리에 육계(肉髻)가 둥글게 솟았고, 뺨에 살이 많이 오른 얼굴은 비대한 편이다. 눈은 길게 반개하였으며, 두툼한 입술은 돌출되었다. 코는 오뚝한데 부분적으로 시멘트를 발라 보수하였다. 양쪽 어깨를 가린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친 법의(法衣) 자락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데, 가슴을 U자형으로 둥글게 팠으며, 하체에는 복부의 반원형으로 새긴 주름이 양 다리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좌우로 기다란 타원형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수인은 왼손은 가슴 높이로 올리고 오른손은 몸 아래로 내린 시무외인(施無畏) · 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으나 좌우 손의 방향이 바뀌었다. 하체의 발밑으로는 대좌를 마련하여 몸체를 끼워 넣었으며 불상의 둘레를 따라 약한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고, 머리 위에 원형의 천개(天蓋)를 얹어놓았다.
불상의 머리 위에 얹은 독특한 천개나 조각 양식상 거불(巨佛) 조성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반적으로 지방색이 뚜렷하며 토속적인 분위기가 강한 불안(佛顔) 표현을 보여준다.
나말여초, 특히 후삼국시대에 와서 태봉의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이 미륵하생 신앙을 내걸고 민심을 모으면서 거대한 마애불이 다수 조성되었다. 후삼국의 군주들은 미륵신앙을 열렬히 지지했고 이와 같은 신앙적 분위기는 고려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홍성 신경리 마애불입상이나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좌상, 함양 마천면 마애불입상, 법주사 마애불의상,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 등 거대한 불상 조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담양 오룡리 석불입상 또한 이러한 영향을 받아 조성된 불상으로서, 당시의 불상 형식과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