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치는 도로 사정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남원과 운봉, 함양을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었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의 정상에 조금 못 미친 국도변 암벽에 새겨져 있는 1구의 마애불좌상으로,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 이야기가 불상에 새겨져 있는 점과 조각형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불상의 높이는 2.5m, 어깨너비는 1.09m이다. 불안(佛顔)은 양 뺨에 살이 많이 오른 비만형으로, 육계(肉髻)는 마멸이 심하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음각선으로 새긴 이목구비가 선명하며 꼭 다문 두툼한 양 입가에는 미소가 패여 있다. 통견식(通肩式)으로 입은 대의(大衣)에는 어깨와 팔뚝은 물론 가슴 아래 복부까지 넓은 U자형 띠주름이 연속적으로 새겨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려 셋째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으며, 왼손은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갔으나 원래는 아래로 내려 뻗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머리 뒤편으로 3중의 원형 두광(頭光)을 새겼으며, 허리 아랫부분부터는 흙 속에 묻혀 있다.
불상의 왼쪽으로 바윗면을 네모나게 도려낸 후 비 형태의 명문(銘文)을 음각하였는데, 1901년(고종 38)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朴貴鎭)이 기록한 것으로, 태조이성계와 이 불상에 관련된 인연설화가 기록되어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이 불상은 여원치 길가의 여상(女像)으로,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지리산 도고(道姑) 할미의 도움으로 왜군과의 황산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것이 그 대강의 내용인데, 이를 증명하듯 민간에서는 오늘날에도 이 상을 ‘여상’이라고 부른다. 마애불의 앞쪽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남아 있는데, 기록 중에 보이는 보호각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 주위에서 기와편들도 함께 발견되고 있다.
불상의 얼굴과 상체가 거의 맞붙은 듯한 짧은 목에 어깨가 넓어 전체적으로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불상이 자리 잡고 있는 남원지방은 삼국시대 이래 정치 · 경제 · 문화 ·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小京)의 하나로 지방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불교가 널리 숭앙되던 곳인데, 이 같은 지리적 요충지에 마애불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조선태조이성계와 이 불상에 관련된 인연설화가 기록되어 있어 민간신앙면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