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입석사(立石寺)에 있는 입석대(立石臺)에서 서북쪽으로 30m쯤 위로 올라간 지점의 한 암벽에 새겨져 있는 1구의 마애불좌상으로, 1998년 9월 5일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불상의 왼쪽 아래에 “元祐五年庚午三月日(원우오년경오삼월일)”이라는 명문이 있어 1090년(선종 7)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마애불이 위치하고 있는 입석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나 소실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 장소에서 토굴을 짓고 수도했다고 하며, 조선 중기의 문신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의 『팔곡집(八谷集)』에 입석대와 입석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어,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절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마애불이 위치하고 있는 원주지역은 당시 수도 개경으로 이어지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지방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 즉위한 이후 고려왕실의 지원 아래 크게 융성하였던 법상종(法相宗)의 근거지로 부상하게 된다. 현재 원주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모두 20여구에 달하는 고려 전기 불상의 조성 배경에는 이 같은 지리 · 경제 · 불교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애불상의 전체 높이는 117㎝, 불상 높이는 62㎝로, 둥근 얼굴에 양 뺨이 부푼 복스럽고도 원만한 상호(相好)를 지니고 있다. 눈 · 코 · 입의 이목구비가 가운데 몰려 있으며 인중이 두툼하다. 머리는 육계(肉髻)가 나지막하고 굵은 나발(螺髮) 가운데에는 중심계주가 장식되어 있다. 오른발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하였으며, 무릎 폭이 비교적 넓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양 어깨를 가리는 통견의 대의(大衣)를 입었는데 옷주름의 표현은 다소 형식화된 느낌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였고, 왼손은 배 앞에 놓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였다. 머리 뒤로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돌렸으며, 발아래에 앙련과 복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蓮花臺座)를 마련하였다.
이 마애불좌상은 9세기 이후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고려시대의 지방 조각에서 나타나는 지방색 대신 세련되고 수준 높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일 양식계열에 속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조아미타불좌상, 경복궁 소재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옥개석의 불좌상(1085년), 원주 법웅사(法雄寺) 소장 전(傳) 천왕사지(天王寺址) 출토 탑신사방불,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등 원주지역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으로, 당시 원주와 충주 일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유파(流派)의 중앙 양식과의 연계를 시사하고 있다.
이 마애불좌상은 고려시대의 지방 조각에서 나타나는 지방색 대신 세련되고 수준 높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원주지역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으로, 이 시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