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절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57년에 경상남도 진주의 금선암(金仙庵)으로 옮긴 것이다.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광배 외연부가 심하게 파손되어 있고, 얼굴도 부분적으로 손상이 심해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육계(肉髻)는 낮은 편이고 나발(螺髮)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불신(佛身)의 당당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넓은 무릎 폭이 만들어 내는 비례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법의는 편단우견(偏袒右肩: 부처가 법의를 입는 형식 중 하나로, 오른쪽 어깨는 법의를 걸치지 않아 노출되어 있고 왼쪽 어깨에만 가사가 걸쳐 있음)으로, 간격이 일정한 평행의 옷주름이 넓은 띠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하반신은 보수 때문에 원래의 옷주름선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쪽 발목 부근에 약간의 주름이 남아 있다. 석굴암 본존불에서 보이는 부채꼴형의 대의 끝 옷주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마모가 심해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고, 왼손은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광배는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갔는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두 줄의 융기선으로 구획하였다. 두광 안에는 연꽃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두 줄의 융기선 밖에는 공양상(供養像)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팔각연화대좌로, 상대(上臺)는 큰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었는데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다. 중대는 팔각으로 모서리마다 기둥을 표현하고 팔각 각 면에 다양한 상을 새겼다. 이 상들은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부드럽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준다. 하대는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 8엽이 새겨져 있다.
산청 사월리 석조여래좌상은 파손된 곳이 많고 곳곳에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당당한 체구와 광배, 대좌의 형태 등을 미루어볼 때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나말여초 불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