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대승사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복장유물 ( )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조각
유물
문화재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고려시대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복장 유물. 보물.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고려시대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복장 유물. 보물.
개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대세지보살상이 협시하는 구도로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협시보살상들은 양식상 조선시대 후기로 편년되어, 고려시대 후기의 특징을 지닌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원래 협시상은 아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87.5㎝이며, 무릎의 폭이 63㎝이다.

내용

불상 속에 있던 대부분의 복장 유물은 없어졌지만, 대덕(大德) 5년(1301)에 인쇄한 다라니가 확인되어 불상의 조성도 대략 이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불두 부분에 아직 남아 있는 복장 유물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확인된 복장 유물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다라니류 3건 12점과 표면에 묵서가 적힌 향낭(香囊) 1점이 있다.

특징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결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약간 경직된 느낌을 주는 코를 제외하면, 내리 뜬 눈과 약간 긴 인중, 살짝 다문 입 등 위엄있는 원만한 상호를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좁고 약간 처져 있으며, 옆모습을 보면 상체가 앞으로 약간 굽어진 자세이다. 가슴과 복부가 풍만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무릎의 높이가 낮아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거의 없고, 머리의 중앙과 정상에는 둥근 형태의 계주를 갖추고 있다. 귓구멍(耳孔)은 8자 형태이며, 그 아래에 다시 8자 형태의 홈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의 물방울 형태에서 진전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후기의 당진 신암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 조선 초기로 편년되는 안동 개목사 목조관음보살상과 예천 용문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모양의 귀는 고려시대 후기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인은 엄지와 약지를 맞댄 아미타불의 설법인이다. 이런 형태의 수인은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보물, 1989년 지정)과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이 시기 불상의 대부분 손금은 卄의 모습이지만, 이 불상은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2003년 지정)등과 같이 井자형이다.

법의는 대의와 내의 등을 통견형식으로 착용하였다. 왼쪽 팔꿈치에 Ω형 주름이 나타나지 않거나, 마름모꼴 금구장식이 없는 승각기, 승각기 아래로 표현된 나비 매듭의 띠 자락은 각각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2008년 지정),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2009년 지정),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2008년 지정) 등과 비교된다. 한편 오른쪽 발목 아래의 八자형 주름과 왼쪽 무릎의 날카로운 잎사귀 모양의 주름은 14세기에 조성된 남원의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2007년 지정)과 유사하다. 따라서 불상은 불두의 모습과 착의법 등을 통하여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복장 유물의 상당수가 이미 없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불상 조성 당시에 궁궐도감 별장 정승설(丁承說)이 복장 납입을 위해 1301년에 특별히 인출한 다라니가 12점 발견되었다. 즉 1301년에 인출한 아미타삼존다라니(阿彌陀三尊陀羅尼) 1장(33×34.5㎝), 고려시대 1292년에 판각하고 1301년에 인출한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 8장(37.5×34㎝), 아자 범자원상 태장계만다라(阿字 梵字圓相 胎藏界曼茶羅) 3장(33×35.5㎝)이 그것이다. 판각과 인쇄 시기를 알 수 있는 이들 다라니는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편년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현황

불상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는 정상계주와 불신 조성에 사용한 동의 재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불상이 원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불상을 통하여 정상계주가 이미 고려시대 14세기 무렵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복장물을 넣은 후 불상의 밑바닥을 나무판으로 마감하는 과정에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밀납과 송진 등을 이용해서 막는 새로운 방식도 불상에서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발원문은 없으나, 복장유물인 다라니의 인출시기를 통하여 고려 후기인 14세기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고려시대 불교조각사의 편년에 기준이 되는 불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금동여래상을 조성하고 복장물을 납입한 후 나무판으로 마감하는 방식도 알려주어 불상 조성 방법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참고문헌

『고려후기 불교조각 연구』(정은우, 문예출판사, 2007)
『문화재대관: 경상북도 편』(경상북도, 2003)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배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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