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인균(印均)은 현재까지 발견된 불상의 조성발원문이나 관련기록을 통해서 볼 때 17세기 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크게 활약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승려 조각승이다. 그는 1663년에 건립된 「국일도대선사벽암비(國一都大禪師碧巖碑)」를 통해 승병장(僧兵將)이자 당대의 최고의 고승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문도(門徒)임을 알 수 있고, 그도 1624년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조성 당시 오위(五衛)의 정6품의 군직에 해당하는 사과(司果)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벽암각성이 이끄는 승군에 소속된 승병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작품이나 기록을 통해 그의 활동시기, 그리고 작품경향을 살펴보면, 그는 1615년김제 금산사 칠성각 독성상(獨聖像)을 수조각승 태전(太顚)과 차조각승 응원(應元)과 함께 제작함으로써 처음으로 17세기 불교미술계에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 그는 같은 문하의 선배 조각승으로 추정되는 응원과 함께 광해군비(光海君妃) 장열왕후(章烈王后)가 발원한 11존상(현존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1622년작) 조성불사에 보조화원으로 참여하였고, 응원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순천 송광사 광원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1624년작)과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1628년작)에 보조화원과 사과(司果)로 각각 참여하였다. 조각 작품 이외 하동 쌍계사 목조원패(1623년작)도 제작하는 등 임진왜란 이후 재건불사에서 다양하게 재능을 발휘하였다.
인균이 응원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작풍을 드러낸 시기는 1630년대이다. 그는 수조각승으로써 1633년김제 귀신사 나한전 석가여래삼존상과 16나한상을 제작하였고,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1636년작) 제작 때에는 다른 계보인 청헌(淸憲)파와 함께 응원파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참여하여 좌협시 노사나불상에서 그의 조각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후 그가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작품은 1648년의 여수 흥국사 무사전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일괄, 1655년의 여수 흥국사 응진당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16나한상 일괄 등을 제작하였고, 이외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에 많이 남아 있으며, 그의 작풍은 그의 제자 삼인(三忍)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행인형으로 두툼하게 부풀린 눈두덩 사이로 고요하면서도 강인한 정신성이 곁들여진 눈매, 다소 늘어진 듯한 볼 살, 큼직한 콧날, 복스럽게 자리 잡은 입술주머니로 양감이 넘치는 중후한 얼굴과 어깨, 무릎 등 신체의 윤곽을 둥글게 처리 하고, 선 역시 이에 상응하게 간결하고 부드러운 선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은 고요하면서도 개성 있는 얼굴, 부드럽고 중량감 있는 형태미 등을 보이는 가운데, 여기에 종교성을 더하여 불격(佛格) 높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