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승 청헌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유파를 이룬 현진파(玄眞派)에서 활동하다가 1620년대 말이나 1630년대 초에 독립하여 독자적인 유파를 이루어 1640년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겨진 작품 예들을 보면, 어느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두루 활동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26년보은(報恩) 법주사(法住寺) 대웅전의 소조삼신불좌상(塑造三身佛坐像)을 조성할 때 수조각승 현진을 이어 차조각승으로 참여한 기록이다. 1636년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대웅전의 목조삼신불좌상 조성 불사에서는 청헌파를 대표하여 후배이자 제자인 영이(英頤)를 대동하고 응원·인균파(應元·印均派)의 응원, 인균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하였다. 즉 삼신불의 좌협시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은 응원파 양식을 갖고 있고, 주존 비로자나불과 우협시 석가불은 청헌파 양식을 갖고 있어, 두 유파가 존상을 나누어 조성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이후 1639년에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 1641년에 완주(完州) 송광사(松廣寺) 대웅전의 소조삼방불좌상, 1643년에 진주(晉州) 응석사(凝石寺)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을 수조각승으로서 작업하였다. 청헌의 작품들은 임진왜란(1592-1598) 종전 이후 전국적인 사찰 재건의 주도적 승려인 벽암각성(碧巖覺性)이 관여한 화엄사와 송광사의 불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나머지도 모두 거찰 주불전의 본존상들이어서 그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헌파의 주요 조각승들은 법현(法玄), 영이(英頤) 또는 영색(英賾), 원택(元澤), 현윤(賢允), 나흠(懶欽) 등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현윤과 나흠은 현재 수조각승으로서 불상을 조성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7세기 후반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조각승들인 승일(勝一), 응혜(應惠), 희장(熙藏) 등도 청헌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이들을 통해 청헌의 작풍은 17세기 후반 조각계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