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수호의 신장상은 고려시대까지 불화나 사경, 벽화 등에서 개별 도상으로 그려졌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각봉안용 불화로서 여러 신들을 함께 그린 신중도(神衆圖)가 조성되었다. 신중도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大雄殿)이나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의 불전(佛殿)이나 보살을 모신 보살전(菩薩殿) 등에 봉안되며, 전각 안에서는 불단(佛壇)을 향하여 우측이나 좌측에 모셔진다. 신중도는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던 대중적인 불화로서 그 도상은 신중들의 서열을 의식하여 배치된다. 신중도의 유형은 제석을 주존으로 하여 권속을 그린 제석천도(帝釋天圖), 위태천을 중심으로 신장상들을 그린 천룡도(天龍圖), 제석천도와 천룡도를 한 화면에 함께 그린 제석천룡도(帝釋天龍圖), 명왕의 일위(一位)인 예적금강(穢跡金剛)과 그의 권속인 팔금강(八金剛), 사보살(四菩薩)이 함께 추가된 신중화가 있다.
조선 초기에 조성된 신중도는 고려후기 불화를 계승한 제석천도가 대부분이지만, 조선후기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신장상들을 무리지어 함께 그린 천룡도가 등장한다.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제석천도와 천룡도가 하나의 화면에 배치되면서 천부중과 신장상들이 함께 그려진 신중도가 성립되며, 19∼20세기 초에는 불교의식이 저변화되면서 강력한 소재(消災)적인 기능을 가진 예적금강이 편입되어 새로운 유형의 신중도가 창출되었다.
신중도의 화면을 구성하는 세 그룹은 천신을 그린 천부(天部), 신장상을 그린 천룡부(天龍部), 예적금강을 그린 명왕부(明王部)이다. 천부만을 독립적으로 그린 제석천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유행했던 형식으로 주로 주존인 제석천이 자신의 거처인 선견성이 그려진 타원형의 부채를 들고 봉황장식의 의자에 앉은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후 18세기 후반 경부터는 합장을 한 형상의 범천․제석천이 함께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룡부만을 그린 천룡도는 위태천을 주존으로 천룡팔부중을 주변에 묘사된다. 용뿔을 든 용 모습의 용왕과 새의 날개를 지닌 가루라, 사자관을 쓴 건달바 등은 도상적인 특징이 명확한데 비해 대부분의 무장상을 무복(武服)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명칭을 알 수 없다. 19세기 후반경에는 신중도의 천룡부에 산신(山神), 조왕신(竈王神) 등과 같은 토속신이 등장하여 민간신앙이 신중신앙과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명왕부에는 더러움을 제거하는 금강이라는 뜻의 예적금강이 주존으로 다면(多面)․다비(多臂)의 분노한 형상으로 표현되며 팔금강, 4보살이 위호하고 있다. 예적금강은 조선전기부터 수륙의식문(水陸儀式文)에서 다른 명왕들과 함께 도량에 강림하여 결계를 호지(護持)하기 위해 봉청(奉請)되는데 불교의식이 활성화되면서 신중도의 중요한 도상으로 등장하였다.
조선 초기의 제석천도는 대부분의 16세기의 작품으로 5점 정도가 일본에 전한다. 조선 후기의 신중도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조성된 수백여 점의 작품이 전하며,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제석천도와 천룡도를 각각 독립적으로 그린 예와 명왕부를 포함한 신중도는 그리 많지 않지 않고, 천부와 천룡부를 함께 그린 신중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 후기의 신중도는 우리나라 신중신앙의 결정체이자 민중불교의 구현체로서 사원의 중심적인 예배대상이 되지는 못했지만 민중에서 보다 친밀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신중도는 미술사적인 측면 뿐 아니라 민간불교의 신앙까지도 포용하고 있어 조선후기의 대중화된 불교의 의식과 신앙을 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