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천주교 유적 ( )

천주교
유적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있는 천주교의 순교 관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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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있는 천주교의 순교 관련 유적.
개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가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후 형장에 버려진 채 그 시신이 감시를 받았는데, 미리내 인근의 검은정이 출신의 이민식(빈첸시오)과 서울의 교우 등 십여명이 밤중에 시신을 찾아서 인근 문배부리, 또는 왜고개 등에 잠시 가매장했다가, 곧 한강을 건너 과천, 양지 등을 거쳐 이동하여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에 안장했다.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1853년 2월 선종한 후, 김대건 신부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고,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와 김 신부의 시신을 이장한 이민식, 미리내 성당의 초대 주임신부 강도영(마르코) 신부, 제3대 주임신부 최문식(베드로) 신부 등도 차례로 김신부 묘역 주변에 묻히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순교 직후인 박해 때부터 신자들의 사적 참배(參拜)의 장소가 되어 오다가, 1896년 미리내본당이 설립된 후, 강도영 신부에 의해 공적인 현양의 장소로 바뀐 이래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3년 수원교구가 설정된 이후 매년 교구의 순교자 현양대회가 개최되었고, 1976년 박해 때 수원 등지에서 순교한 무명순교자의 묘역까지 조성되었으며, 1984년 103위 시성기념(諡聖紀念) 성전이 1991년 건립되는 등 성역화(聖域化) 작업이 계속되면서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성지가 되었다.

역사적 변천

‘미리내’는 원래 은하수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1842~1843년경에 작성된 『경기지(京畿誌)』의 양성현(陽城縣) 조에 나오는 금곡면(金谷面) 소속의 ‘미이천리’(彌迤川里)가 ‘미리내’를 한자로 표기한 최초의 기록인데, 이후 ‘미리천’으로 불리었다. 1914년 당시 양성군에 속한 ‘미리천’은 인근의 ‘산촌’, 양지군 고북면 ‘약산리’ 등과 통합되어 ‘미리천’과 ‘산촌’의 첫 글자만을 따서 ‘미산리’로 불리게 되어, 2011년 오늘에 이른다.

특징

오늘날 미리내는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성인의 신심을 기리는 성지(聖地) 겸 인근 지역의 신자들을 사목하는 본당사목구(本堂司牧區, 약칭 본당)가 함께 설정되어, 순교자 현양을 통한 순례자 사목과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본당 사목이 동시에 병행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미리내는 1840년 이전의 박해시대 교우촌에서 시작되어 성 김대건 신부와 순교자, 성직자 등의 무덤이 조성되고, 몇 차례 기념성전이 건립되는 등 성역화 작업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현양의 발원지로 자리매김 되고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성지(殉敎聖地)가 되었다.

참고문헌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 2004)
『병인치명사적』(절두산 순교박물관 소장)
『교회사학』제5집(미리내성지 특집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순교의 맥을 찾아서』(오영환·박정자 지음, 수원교회사연구소 감수, 가톨릭출판사, 2009.9)
집필자
원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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