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만(李北滿), 조중곤(趙重滾), 한식(韓植), 김두용(金斗鎔), 홍효민(洪曉民), 고경흠(高景欽), 홍양명(洪陽明), 장준석(張準錫), 전철박(全澈珀), 이학인(李學仁) 등.
1927년 4월 경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이북만, 조중곤, 한식 등 조선인 학생들은 무산계급(無産階級) 문예(文藝) 운동(運動)을 전개하는 방편으로 〈제3전선사〉를 조직하고, 같은 해 7월까지 기관지 『제3전선』의 창간호와 제2호를 발간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생각을 조선에 전파할 뜻을 세우고 같은 해 6월에서 8월에 걸쳐 부산, 대구, 경성, 함흥 등 각지에서 〈귀국 문예 순회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5,6백여 명의 청중들이 운집할 정도로 성황리에 이루어졌으며, 방계(傍系) 조직인 〈학생예술연구회〉를 앞세운 카프의 실질적인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기관지 『제3전선』의 발행과 이 순회 강연회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이 김두용, 이북만, 한식, 조중곤, 장준석 등이었음으로 이들을 〈제3전선파〉의 대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훗날 카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임화가, 이 귀국 강연회를 계기로 ‘문화주의’적이었던 예술가동맹이 〈제3전선파〉의 ‘정치(政治) 기분’에 이끌리어 급격히 정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고 술회했을 만큼 이들이 카프에 미친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사실 카프는 신경향파(新傾向派) 시대를 이끌어온 자연발생적 문예 운동의 다양한 욕구를 묶어 1925년 8월에 한국 문학사 최초의 문예 운동 단체로 출발하였지만, 이 시기까지 조직의 목표나 방향에 있어 신경향파적 속성을 떨치지 못한 채 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1926년 말 김기진(金基鎭)의 문제 제기로 촉발된 〈내용 형식 논쟁〉 과정에서, 박영희는 당대가 강력한 정치 투쟁기임을 전제로 김기진의 논리가 지닌 문학주의적(文學主義的) 속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카프 내부에서는 목적의식적인 정치 투쟁의 단계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3전선파〉의 등장은 카프 내부의 이러한 방향 전환 논의를 가속화함으로써 우선은 박영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제3전선파〉는 박영희로부터 카프 방향전환론의 주도권을 넘겨받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문예 운동과 정치 투쟁이 새의 양 날개와 같다는 박영희의 인식이, 김기진의 그것과 별다를 바 없이 소박한 문학주의에 기초한 것임을 공박하였다. 나아가 문예 운동이란 당면한 마르크시즘적 정치 투쟁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고, 카프의 방향을 그에 맞추어 수정할 것을 주장하여 맹원들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제1차 방향 전환을 매듭지었다.
이들 〈제3전선파〉는 순회 강연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카프 지도부와의 논의를 통해 (1)카프의 도쿄 지부를 만든다는 것, (2)서울보다 분위기가 다소 자유로우므로 카프의 기관지를 도쿄에서 발행키로 한다는 것 등의 합의 내용을 가지고 도일(渡日)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10월, 이들을 중심으로 카프 도쿄 지부가 공식적으로 발족하자 ‘제3전선’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그 조직 속으로 해소되어 사라졌다.
〈제3전선파〉의 주도로 만들어진 카프 도쿄 지부는 1927년 11월에 카프 최초의 기관지인 『예술운동』을 창간하여 1928년 2월, 제2호까지 발행하였다. 하지만 조선 내에서의 카프 탄압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하여 더 이상 책을 내지 못하고 잠복하다가, 1929년 5월에 합법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를 만들어 기관지 『무산자』를 발행함으로써 다시 문예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이 과정에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안막(安漠) 등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소장파들이 가세하였고, 이들이 카프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여 조직을 장악하게 된다. 이처럼,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카프의 두 방향 전환에 직, 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3전선파〉는 일제강점기 문예 운동사를 주도해 간 중요한 축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