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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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창간된 문예지 『문장』을 중심으로 등단하거나 작품 발표의 주요 무대로 삼은 일군의 문학인들을 아우르는 문학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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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9년 창간된 문예지 『문장』을 중심으로 등단하거나 작품 발표의 주요 무대로 삼은 일군의 문학인들을 아우르는 문학유파.
개설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창간한 잡지 『문장』은, 『인문평론(人文評論)』과 함께 당대 문학의 장(場)을 주도하였다.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하는 한편 시에 정지용(鄭芝溶),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문장』은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이나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내었다.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 용지난으로 중간에 휴간을 하기도 했으며, 1941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결국 폐간하였다. 해방 후인 1948년 10월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하였다. 이 기간 동안 『문장』은 소설 부문에 최태응(崔泰應) 등 10명, 시 부문에 이한직(李漢稷) 등 11명,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등 6명의 신인을 배출하였다. 따라서 〈문장파(文章派)〉란 잡지의 편집진, 미술을 책임졌던 이들, 추천 신인들, 나아가 잡지에 글을 발표한 사람들 일반을 아울러 생각할 때,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임의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내용

〈문장파(文章派)〉라는 용어에는 잡지 『문장』과 『인문평론』의 성격을 대비(對比)하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비평가 최재서(崔載瑞)가 주관한 『인문평론(人文評論)』은 1939년 10월에 창간되어 『문장』과 함께 1941년 4월에 폐간된 종합 문예지인 바, 『문장』과는 달리 다분히 서구 문화 지향에 비평 중심 편집 방향을 고수했다. 이에 비해 『문장』은 다분히 전통(고전 혹은 동양) 지향적이면서 창작 작품의 발표에 역점을 두는 차이를 보였다.

〈문장파〉 글쓰기의 기본 방향은 『문장』 편집진의 성향과 문학적 성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구인회〉 멤버였던 주간 상허(尙虛)이태준은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 소설의 예에서 보듯이 토착적인 인물들의 애수어린 삶을 차분하게 묘사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이 시기 상허는 우리말 문장론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문장강화(文章講話)」를 연재하고, 틈틈이 우리 고완(古玩 ‘골동’)과 고서화(古書畵)에 대한 애정을 피력한 수필들을 써서 그것을 『무서록(無序錄)』(1941)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한편 시인 정지용은 『정지용시집』(1935)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조선어에 대한 세련된 감각 위에 동양 고전(古典)의 정신주의를 접목한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을 문장사(文章社)에서 발행하였다. 특히 세속과 절연된 산(山) 속을 배경으로 하여 극기와 금욕의 견인주의적(堅忍主義的) 자세를 노래한 「장수산(長壽山)」, 「인동차(忍冬茶)」나 「백록담」의 세계는 〈문장파〉의 문학적 성취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지용은 고전에의 경사(傾斜)를 주문하는 산문을 잇달아 쓰기도 하고, 자신의 뜻에 부합하는 신인들의 발굴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가람(嘉藍)이병기는 조선어의 조탁을 바탕으로 시조를 현대화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관철한 작품들을 모아, 1939년문장사에서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집을 펴냈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가람은 『문장』을 통해, 잊혀진 우리 고전 작품들을 발굴하여 총 19호에 걸쳐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세 문학인 편집진에 더해 미술 쪽을 맡은 근원(近園) 김용준의 행보도 〈문장파〉라는 무리 의식을 만드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지적도 있다. 서양 미술 전공자였던 그가 이 무렵 독학으로 한국화의 세계로 진로를 완연히 바꾸었고, 문(文)·사(史)·철(哲)을 아우르는 해박한 문장으로 우리 옛것에 대한 애정을 피력한 수필들을 연이어 발표(해방 후에 발행한 『근원수필』이 그 결과로 상허의 『무서록』과 함께 우리 현대수필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장』 편집진들은 (1)우리 전통 문화나 동양 고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2)우리말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3)그러한 관심을 실제 창작에 반영하여 고아(古雅)한 문학 작품들을 많이 남김으로써 〈문장파〉라는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장』은 또한 신인 추천제를 통하여 많은 문인들을 발굴하였다. 소설에 최태응(崔泰應)·곽하신(郭夏信)·임옥인(林玉仁)·지하련(池河蓮)·정진엽(鄭鎭葉)·한병각(韓柄珏)·선진수(宣鎭秀)·유운경(劉雲卿)·허민(許民)·임서하(任西河), 시에 이한직(李漢稷)·김종한(金鍾漢)·박남수(朴南秀)·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조지훈(趙芝薰)·박일연(朴一淵)·조정순(趙貞順)·최남령(崔嵐嶺)·허민(許民)·황민(黃民), 시조에 조남령(曺南嶺)·김영기(金永起)·김상옥(金相沃)·이호우(李鎬雨)·장응두(張應斗)·오신혜(吳信惠) 등이 그들이다. 등단 신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소설보다는 시와 시조 쪽으로 무게가 많이 기울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서도 소위 〈문장파〉적 문학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이 해방 후에 『청록집』을 공동 발행하게 되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다. 뒷날의 행보나 성취, 이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문학 성향 등으로 보아 이들을 〈문장파〉로 분류하여 크게 무리는 없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이들은 『문장』에 의해 이제 막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신인들이어서 〈문장파〉의 중심이었다거나 〈문장파〉의 문학성을 주도했다고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문장파〉의 성격을 형성한 또 다른 요소로는 국어국문학, 미술사학 및 민속학 분야에 대한 『문장』의 기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희승(李熙昇), 송석하(宋錫夏), 조윤제(趙潤濟), 손진태(孫晉泰), 고유섭(高裕燮), 양주동(梁柱東), 정인승(鄭寅承), 최현배(崔鉉培) 등 쟁쟁한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발표하고 자료를 발굴, 소개함으로써, 『문장』은 일제강점의 말기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지키는 터전의 구실을 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김윤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정지용 문학의 현대성(鄭芝溶 文學의 現代性)』(김신정, 소명출판사, 2000)
『한국현대시론사연구(韓國現代詩論史硏究)』(한계전 외, 문학과지성사, 1998)
『한국현대시사(韓國現代詩史)』2(김용직, 한국문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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