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기는 1951년 부산에서 박인환·김경린·김규동·이봉래 등이 결성하여 1954년경까지 활동한 모더니즘 지향의 시문학동인이다. 후반기라는 명칭은 1950년대 이후, 즉 20세기의 후반기라는 말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의 황폐한 상황을 문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멤버는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 6명이다. 후반기는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소멸된 임화와 김기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과 같은 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후반기」의 정규 동인 구성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이는 「후반기」가 자신들만의 동인지(同人誌)를 내지 않아 구성원을 확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후반기」 자체가 문학적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다소 느슨한 임의 단체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란을 피해 온 박인환, 김경린, 양병식(梁秉植) 등이 부산의 시인 조향과 어울리면서 모더니즘 시 운동을 전개하자고 뜻을 모으자 이에 동조하여 김차영이 가담하였다. 이후 양병식이 빠지고 이봉래, 김규동이 참여하여, 「후반기」의 멤버는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 6명으로 고정되었다.
이들 외에 김춘수(金春洙), 김수영(金洙暎), 김종문(金宗文), 박태진(朴泰鎭), 전봉건(全鳳健), 이활(李活) 등이 후반기의 방계(傍系)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후반기」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1949년에 사화집(詞華集)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낸 「신시론(新詩論)」 동인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경린, 박인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林虎權), 김병욱(金秉旭) 등이 모여 만든 「신시론」 동인들은 표면적으로는 구시대 시문학과의 절연이라는 단일 목표를 앞세웠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선보인 그들의 시세계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양쪽에 걸쳐 있는 모습이었던바, 그 두 지향성에 있어서도 그들의 선배격인 임화(林和)나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앞세운 ‘새로움’이란 결국 ‘전통주의적 관점’에 대한 반발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들 가운데 임호권과 김병욱이 월북하고, 나머지 모더니즘 지향의 시인들이 남아 직, 간접으로 「후반기」의 결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반기」란 결국 「신시론」이 지닌 문제의식의 발전적 해체 혹은 그 이념적 계승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반기」는 자신들의 기관지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주간 국제(週刊國際)』나 『시와 비평』, 『신시학(新詩學)』등을 작품 발표의 장으로 삼았다. ‘후반기(後半期)’라는 용어는 1950년대 이후, 즉 20세기의 후반기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이에는 한국전쟁 이후의 황폐한 상황을 문학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려는 뜻이 들어있다.
그들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 파괴와 살육 등으로 얼룩진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각성 아래, 그러한 현실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시적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청록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세계, 즉 남한 문학의 현장에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기성의 문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청록파」의 순수시 운동이 전후(戰後)의 현실과는 무관한 자리에서 음악성에 대한 집착, 시적 언어의 단순성, 개인 정서와 취향에만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반 전통의식을 바탕으로 「후반기」 동인들은, 대체로 (1) 현대 문명에서 소재를 찾아 도시적 서정을 가능성을 확인하려 하거나, (2) 20세기 물질문명에서 비롯한 불안 의식이나 그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명하고, (3) 그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서구 모더니즘의 방법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현대문명의 비극성과 정신적 황량감을 그리려 노력했던 박인환이나, 현대 도시 문명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려 노력한 김경린, 전쟁의 상처와 불안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드러냈던 김규동, 초현실주의 지향의 미의식을 바탕으로 언어와 기교의 발견에 기울었던 조향의 작품들은 이런 「후반기」 동인들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후반기」 동인들이 고창(高唱)한 문학적 이념과 그들 작품에 나타난 여러 특징은, 한국전쟁이라는 소재 차원의 새로움을 제외하면, 결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1930년대 모더니즘 작품들이 이미 한번쯤 짚었던 문제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들의 모더니즘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아류로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기수(旗手)였던 김기림이, 해방기를 맞아 민족 단위의 새나라 건설이라는 ‘조선의 특수성’에 눈뜸으로써 현실성을 얻었음에 비길 때, 1950년대 「후반기」의 시가 지구적 문명 일반이 빚는 불안의식 묘사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1930년대로의 후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기」의 문학사적 의의가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 문학 능력의 후퇴인 채로나마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청록파」로 대표되는 ‘전통주의적 순수 문학’만이 우리 문학사의 유일한 전통은 아니라는 점이 계속 환기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소멸되어버린 임화와 김기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즉 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해방기의 시와 1960년대 김수영, 신동엽 시의 가교(架橋)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