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국청사 금고는 직경 66㎝ 크기, 무게 100근의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금고로 뒷면에는 1666년에 승장 태응(太應), 신열(愼悅), 영득(永得)이 연화산 장천사 금고로 제작하였다는 양각의 묵서로 된 명문이 있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慶尙道慶州府南蓮花山障川寺禁氣重百斤(경상도경주부남련화산장천사금기중백근)/ 康熙伍年丙午三月日鑄成(강희오년병오삼월일주성)/ 施主秩(시주질)/ 朴忠民(박충민)/ 李莫(이막) 男(남)/ 大匠太應(대장태응)/ 慎悅(신열)/ 永得(영득)/ 化主秩(화주질)/ 戒湖(계호)/ 雪訔(설은)/ 雪岩(설암)/ 雪心(설심)
조선시대 기년명(紀年銘) 금고 중 영천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1646년. 보물, 2009년 지정) 다음으로 오래된 예이다.
국청사 금고의 형태는 거(虡)에 고정하는 고리가 3개 달려있으며, 앞면은 가는 선과 굵은 선으로 구성된 2줄의 태조선대(太彫線帶)로 구획된 내구(內區)와 외구(外區)에 양각 문양이 있고 뒷면의 공명구는 넓게 뚫린 모양이다. 앞면 내구에는 중앙의 당좌를 중심으로 5개의 원문범자(圓文梵字)가 돌려져 있으며, 외구에는 간략한 잎과 간지(幹枝)가 육릉형(六菱形)을 이루는 당초문이 있어 장식성이 엿보인다. 뒷면의 구연부는 수직이 아니라 큰 각도로 뚜렷하게 벌어져 있는데, 그 안쪽에 제작연대와 장인명을 알려주는 양각 명문과 같은 내용의 묵서명이 있다. 측면에는 금고 제작에 동참한 사찰의 인물들과 시주자들이 점각(點刻)되어 있다. 은해사 금고는 사장(私匠)인 김암(金岩)이 제작한 것으로 전면에 봉황문과 운문, 연화문을 장식한 형태인데 비해 국청사 금고는 대비구(大比丘; 묵서명) 태응을 비롯한 승장들이 제작한 점과 원문범자가 금고에 처음 등장한 점이 다르다. 이후 18세기 금고들은 김룡사 금고처럼 전면에 당좌와 1∼2줄의 태조선대만 있는 무문이거나 남해 용문사 금고, 의성 고운사 금고(1790년)처럼 당좌와 외구에 원문옴자만 있는 예로 대별되므로 국청사 금고는 18세기 금고의 선행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금고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국청사 금고는 규모가 크고 장식성도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 금고의 선행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 제작시기와 장인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다는 점에 불교 공예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