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다음과 같은 시기구분을 나타낸다. ①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선전활동, ② 1919년 8월 말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가 설립된 후 그 산하의 파리사무소와 런던사무소의 활동, ③ 1920년대 중반의 유덕고려학우회의 활동, ④ 193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영해徐嶺海와 고려통신사의 활동, 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공 이후 제네바의 국제연맹을 상대로 한 이승만李承晩의 활동 등이 유럽에서 독립운동의 주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파리한국통신부의 독립운동:
파리강화회의 외교활동을 위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된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착수했다. 김규식은 파리 시내 ‘샤토당’가 38호에 ‘강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이후 대한민국 주파리위원부통신국Bureau de Information Coreenne,‘파리한국통신부’, ‘파리위원부’, ‘파리통신부’ ‘파리주재 한국위원부’ 를 설립하였다. 파리한국통신부의 초기 조직은 위원장 김규식을 비롯하여 부위원장 이관용, 서기장 황기환으로 구성했다. 이외도 1919년 5월초에 김탕金湯, 6월말에 조소앙趙素昻, 7월초에 여운홍呂運弘 등이 파리에 도착하면서 파리한국통신부는 활기를 띠었다.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의정원은 김규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주駐파리한국통신부 대표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발송했다. 이때부터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파리한국통신부는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신임장을 프랑스정부를 비롯한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한 뒤 공식적인 외교기구로 활동했다.
1919년 5월 12일 영어와 프랑스어로 인쇄된 「독립공고서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를 만들어 파리강회회의 의장 끌레망소와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그리고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수반들에게 발송했다. 이어 5월 24일에는 다시 끌레망소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서한을 발송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과 임시정부의 외교대표인 김규식의 외교활동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서한에 대해 강화회의의 참가국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통신부는 6월 11일 다시 서한을 보내 강화회의가 한국민족의 요구를 묵살하지 말고 한국대표단의 발언을 청취할 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6월 14일과 16일에는 강화회의 참석차 파리에 가있던 영국의 로이드 수상과 윌슨 미국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인 열강들의 이권도모를 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파리한국통신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약소민족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강대국의 전후戰後 처리문제에만 집중하였고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토론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파리강화회의 종결 이후에도 파리한국통신부는 선전외교활동을 계속 추진했다. 1919년 6월 30일 강화회의 미국대표단을 상대로 한국문제를 설득하였으며, 7월 28일에는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 한중 양국문제에 대한 연설회를 가졌다. 7월 30일에는 프랑스 국민정치연구회에서 한국문제보고회를 가져 프랑스인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파리한국통신부는 한국문제를 국제문제화 시키는데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편 파리한국통신부는 1919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 참가하여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한국독립을 승인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7월 17일자로 대회 참가요청서를 보낸 조소앙은 참가승인을 받자 파리한국통신부 부위원장인 이관용과 함께 8월 4일 ‘조선사회당’의 대표로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가했다. 두 사람은 ① 본회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승인할 것, ② 본회로부터 대표를 파견하여 동아정세를 조사토록 할 것, ③ 본회에서 동서로 연락하고 혁명을 촉진케 할 것 등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 집행위원회의에도 참석해 “각국 대표가 스위스에서 가결한 한국독립 승인문제를 본국 국회에 제안해 통과토록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이처럼 파리한국통신부는 기회가 있는 대로 국제연맹과 프랑스·영국, 그리고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정기간행물 및 소책자를 발행하는 등 홍보활동과 친한단체의 조직에 전력하였다.
독일, 유덕고려학우회의 설립과 활동:
독일 거류한인들의 활동은 유학생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를 설립했다. 설립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1년 1월 1일 설립한 것으로 나타난다.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는 구제활동·임정지원활동·대외선전활동·국제대회 참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유덕고려학우회는 포츠담에서 매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삼아 기념식을 갖고 나라 잃은 아픔과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고, 매주 강연 또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관용을 강사로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피압박민족대회 외교활동:
피압박민족대회는 약소민족과 무산계급의 협력을 도모, 전세계 피압박 계급과 민족들의 생존권을 보장, 민족의 자유와 인류 평등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반제국주의 대항책을 강구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원래는 1926년 8월 베를린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식민지 민족대표의 여행권 불허 사정과 각 민족대표들의 불참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10일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으로 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국내에서는 1927년 1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피압박민족대회와 식민지사정박람회가 개최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국내 언론은 피압박민족대회를 제국주의 국가들이 각 식민지에서 행하는 비인도적이고 불합리한 사실들을 모아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간의 반목과 알력이 되는 모든 것을 적발하여 공개하려는 대회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 의의와 목표가 특수하여 세계의 이목과 흥미를 유발하는 전무후무한 대회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일제강점기 국내 한인들에게 이번 대회를 보는 인식은 매우 각별했다. 한국대표단은 피압박민족대회에 제출할 안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작성했다.
① 하관조약下關條約을 실행하여 조선 독립을 확보할 것.
② 조선의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③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대회의 주요 관심사는 반제국주의와 그 연장선에서 나온 반영운동反英運動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와 관련해 중국·인도·이집트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한국측 제안을 비롯해 대부분 약소민족의 제안에 대해선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피압박민족대회는 2월 14일 폐막되었다.
대회 개최의 목적과 달리 피압박민족대회에서는 기대했던 한국 민족과 같은 식민지 민족의 처지에 대해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의 활약상과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반제국주의운동과 피압박 민족 및 계급에 대한 동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는 때에 피압박민족대회를 기회로 삼아 국제사회에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고발한 것은 높이 평가되는 활동이었다. 특히 한국대표단이 체계적으로 준비한 『한국문제』를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 그리고 대회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것은 유럽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승만의 국제연맹 및 소련과의 접촉:
이승만은 중일분쟁과 연계하여 국제연맹에 한국문제를 제출하고자 나섰다. 그는 1933년 1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제네바에 머물며 국제연맹 및 그 회원국 대표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제네바에 도착한 1933년 1월 4일부터 2월까지 이승만은 국제연맹 가맹국 대표들과 언론인 등을 집중적으로 만나 한국문제의 연맹 제출 가능성에 대하여 타진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행보는 국제연맹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언론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3월 26일에 『만주의 한국인들: 이승만 박사의 논평과 함께 리튼보고서 발췌The Koreans in Manchuria: 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Dr. Syngman Rhee』라는 팜플렛을 출간했다. 이승만은 이 책을 통하여 만주의 한국인 문제들에 대한 정당한 고려 없이 만주분쟁의 해결은 바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 회복만이 19세기 말 이래 지속되어 온 일본의 대륙팽창 욕구를 저지할 수 있는 보루가 된다는 사실을 국제연맹과 그 회원국 대표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제네바에서의 이승만의 활동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제연맹 및 그 회원국들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던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는 만주의 한국인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는 가운데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국제연맹의 리튼보고서 채택에 일조했다. 미국과 연맹 내 소국들이 이승만과의 활동에 대하여 관심과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것도 사실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팽창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주사태와 관련하여 리튼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은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의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외교적 고립의 길을 자초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25일에 이승만은 제네바의 한적한 교외에서 미국총영사 길버트와 점심을 나누며 그의 소련 행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승만은 일본의 대륙팽창이 결국에는 미국과의 충돌로 연결될 것으로 내다보고, 그때를 대비하여 ‘모험적인’ 소련 방문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우선 일본의 대륙침략의 희생물이 되었던 중국과 한국 그리고 소련이 반일연합전선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4일에 출범한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이 아시아와 유럽에서 일본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 승인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도 이승만의 소련 행을 부추긴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볼세비키 혁명이후 외부세계에 잘 노출되지 않고 있던 소련의 실상을 살피는 동시에 정부 당국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어둠으로써 장차 한국이 독립되었을 때 소련의 한반도 진출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대한 견제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에서 소련과의 우호적 협력관계 구축은 실용적인 외교적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은 시베리아의 한인사회를 방문하고 이 지역 독립운동자들과 직접 만남으로써 향후 일본과 중국, 일본과 소련, 나아가 일본과 미국이 충돌할 가능성에 대비한 준비를 해두고자 했다. 만주가 일본의 군사적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을 놓고 본다면, 시베리아의 ‘100만’ 한인사회야말로 대일항전을 독자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인적 기반과 지리적 조건을 갖춘 마지막 보루였다. 이승만은 이들의 무장에 필요한 군사적·재정적 지원은 장치 소련이나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요량이었다. 이러한 다목적을 지니고 있던 이승만의 소련행은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착해 호텔에 투숙하자마자 소련 외무부의 전령으로부터 출국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그가 구상했던 국제적인 항일연대 구상과 시베리아의 한인사회 방문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0년대 유럽지역에서 전개한 한국독립운동의 성과와 의의는 첫째, 외교운동이 한국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방략임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노출시켜 주었다. 3·1운동 전후 구미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외교독립운동은 국제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며 한국독립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요소임을 부상시켜 주었다. 하지만 외교운동의 성과는 비록 장기적인 측면에서 그 효과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단기적인 측면에서 얻는 효과는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이 한인들의 활발한 외교활동에 비해 한국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외교활동이 갖는 성과와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이후 외교운동을 추진하는데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고 다양한 방향으로 추진하게 만들었다.
둘째, 선전과 홍보를 통한 활발한 독립운동이 외교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주로 외국의 사회 및 종교 단체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문제와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 선전과 홍보활동은 친한여론을 형성하고 한국친우회와 같은 친한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했다. 이같은 활동은 구미지역 독립운동의 주요 성과이자 특징이었다.
셋째, 최초의 비행학교를 설립해 운영함으로써 구미지역이 외교독립운동 외에 무장독립운동에도 앞장섰음을 보여주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국내와의 교통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비행가양성소라는 비행학교 설립·운영은 구미지역 다운 선진적인 무장투쟁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비록 운영은 지속되지 못해 연속성이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통해 구미지역 한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독립의 열망과 기상을 잘 보여주었다.
넷째, 유럽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은 초창기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한 임정 차원의 외교활동 외에 주로 한인 근로자나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활발히 이루어진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재법한국민회와 유덕고려학우회의 활동은 유럽 거류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1920년대 구미지역의 독립운동을 언급할 때 파리강화회의 외교라는 정부적 차원의 활동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 차원의 활동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대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