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법한국인회 ()

사회구조
단체
1919년에 설립된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
정의
1919년에 설립된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
개설

한인 노동자와 고학생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유럽 최초의 한인 단체이다.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기근을 당한 국내에 구휼 활동을 위한 성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설립목적

프랑스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친목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19년 11월 19일에 홍재하를 포함한 35명의 한인 노동자와 고학생들은 모임을 갖고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하였다. 1920년 10월 31일에는 재법한국민총회의를 열어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를 만들었는데, 개진회는 재법한국민회와 이름만 다른 뿐 같은 단체로, 12일에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서 열린 각국 국제연맹옹호연합대회에 대표를 파견한 뒤, 이 조직에 가입하려고 미리 결성된 것이었다. 자연히 이 모임은 전쟁 이후의 세계 평화와 안정보장을 위하여 출범한 국제연맹과 한국의 관계를 알고자하는 의도를 가졌다.

그 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파리위원부(巴里委員部)의 활동은 중단되었고, 중국과 러시아의 독립운동 단체도 분열하여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1923년 6월에 홍재하는 재법한국민회를 정비하여 파리한인친목회를 다시 결성하였다. 이 때부터 한인들은 연호를 ‘민국 5년’이라고 부르지 않고, ‘독립선언 제5년’이라고 고쳐 불렀다.

기능과 역할

1919년 4월에 파리에 설치된 파리위원부는 한인들의 단체 노동을 주선하였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인들은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위원부의 사업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재법한국민회는 위원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곧1919년 11월 19일∼1920년 5월 18일에 모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인 6,000프랑을 위원부에 기부하였는데, 이 돈은 35명의 한인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 가운데 매달 930프랑 정도를 모은 것에 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재법한국민회는 유럽, 특히 파리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자연히 유럽의 독립운동은 ‘파리강화회의 외교’라는 정부 차원의 활동에서 벗어나 민간 차원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대에 독일의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펴나갔고, 회원들은 서류상 중국인으로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54: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고정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집필자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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