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청원(靑園), 출신지는 미상이나 서울로 추정된다. 191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에 유학하여 1925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4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근무하였고 1933년에 한성의사회 회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주요 조선인 고미술품 수장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방대한 수장품을 1940년과 1941년의 경매회를 통하여 모두 처분하였다.
1897년에 태어나 서울 수하동(水下洞) 보통학교 졸업 후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일제강점 후인 1913년에 명칭과 편제가 바뀐 경성고등보통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토지조사국에 근무하였다. 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시험 및 보통문관시험에서 모두 수석을 하여 수재로 이름이 났다. 191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에 총독부 관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유학하였다. 1924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근무하였고 1925년에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는 내장외과로 받았으나 전공은 항문외과(肛門外科) 곧 치질이었다. 1931년에 한성의사회 부회장, 1933년에는 한성의사회 회장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여러 회사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치과대학, 경기중학 등의 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였다.
박창훈은 고미술품 거래가 호황을 이루던 1930년대에 한중일의 서화와 도자기는 물론 금동불, 가구, 목공예품 등에 이르는 다양한 고미술품을 수집하였다. 1934년에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朝鮮中國名作古書畵展覽會)'와 1938년오봉빈(吳鳳彬)의 조선미술관이 주최하고 매일신문사 후원으로 경성 부민관(府民館)에서 개최된 '조선명보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에 각각 19점과 10점을 출품하였다. 1940년 4월 5일에서 7일까지 서울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에서 개최된 경매회 당시 발간된 『부내박창훈박사소장품매립목록(府內朴昌薰博士所藏品賣立目錄)』을 통해 247점의 고미술품을, 1941년 11월 1일에서 2일까지 역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개최된 경매회 당시 발간된 『부내박창훈박사서화골동애잔품매립목록(府內朴昌薰博士書畵骨董愛殘品賣立目錄)』을 통해 326점의 고미술품을 출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창훈은 방대한 수장품의 처분에 대하여 자녀 교육비 등을 운운하며 변명하였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고 고미술품을 처분하여 이익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4월 5일 부산 피란 중에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