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태 ()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한성치과의사회 회장, 서울 삼각정 총대 등을 역임한 수장가.
이칭
이칭
토선(土禪)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9년(고종 26)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강릉(江陵)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 세죽리
관련 사건
안창호(安昌浩), 김약수(金若水) 등 치아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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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한성치과의사회 회장, 서울 삼각정 총대 등을 역임한 수장가.
개설

평안북도 영변 출신. 호는 토선(土禪). 1912년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1914년 6월 19일서울 삼각정 1번지에 한성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1925년에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고미술품을 많이 수장하였다. 1944년 9월 또는 10월경 일제의 소개령에 의해 고미술품을 추려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광복 이후 월남하려 하였지만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9년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와 의관(議官)을 지냈다고 하는 함영택(咸泳澤)의 외아들로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오리면(梧里面) 세죽리(細竹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과정과 치과의사 지망 동기 등에 대한 기록은 알려져 있지 많지만, 대부호의 후손으로서 개화된 집안 분위기에 의해 선진 학문분야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현 일본치과대학)을 졸업하고 1913년 말에 귀국한 후 1914년 2월 5일에 한국인 최초로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하였다. 1914년 6월 19일 경 서울 삼각정(三角町: 현 서울시 중구 삼각동) 1번지 옛 제창국(濟昌國) 자리 동쪽에 한성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1925년에는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성치과의사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운동가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 선생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등의 치아도 치료했으며,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손녀 강영재(姜英才)를 맡아 키워 이화여전을 졸업시켰다.

그가 고미술품을 수장하게 된 동기는 확실치 않으나 장택상(張澤相)의 수표동 자택 사랑방에서 이루어진 고미술품 수장가 모임의 주요 멤버의 하나로 참여한 것을 특기할 만하다. 그의 소장품의 전모는 알 수 없으나 특히 도자기 소품을 많이 모아 일제강점기 당시의 대표적인 화상(畵商)이자 전시기획자인 오봉빈(吳鳳彬)이 ‘소물진품대왕(小物眞品大王)’이라 부를 정도였다. 1935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15권(조선시대 도자)에 조선 사람으로는 가장 많은 15점의 소장품을 수록하였다. 1930년 10월 17일에 동아일보사 3층에서 개최된 ‘조선고서화진장품전람회’, 1934년 6월 22일에 개최된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 1938년 11월 8일에 개최된 ‘조선명보전람회’에 각 4점, 20점, 6점을 출품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9월 또는 10월경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세 대의 차에 싣고 자신의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한 함석태의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황해도 해주를 거쳐 가족과 고미술품을 가지고 월남하려했지만 실패한 듯하다는 구전이 전해올 따름이다.

참고문헌

『한국치의학사연구』(신재의, 참윤 퍼블리싱, 2005)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치과의사 함석태」(김상엽, 『향토서울』 76,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10)
「함석태 연구」(신재의, 『대한치과의사협회지』, 대한치과의사협회, 2003)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선생(1989-)」(기창덕, 『대한치과의사협회지』, 대한치과의사협회, 1993)
「한국인 최초의 정규 치과의사」(이한수, 『한국치학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8)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스토리」(치과임상 편집부, 「함석태를 말한다 - 손자 각씨와의 인터뷰」, 『치과임상』 1985)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이한수, 『이한수치학박물지』, 석암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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