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 출신. 사호(沙湖)송수면(宋修勉)의 조카로 자는 평숙(平淑), 호는 염재(念齋).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났고 매일신보 기자로 잠시 활동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낙향하여 보성, 능주, 순천, 고창 등에서 한문과 서화 등을 가르쳤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입선한 후 글씨와 사군자에서 모두 9회에 걸쳐 입선하였다.
1872년(고종 9)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사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로 전남 화순 동복에서 살다 간 사호(沙湖)송수면(宋修勉: 1847∼1916)의 형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긍면(兢勉)이다. 긍면의 3남으로 태어난 송태회의 자는 평숙(平淑), 호는 염재(念齋), 말년에는 염재옹(念齋翁), 염재거사(念齋居士)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나 16세에 형 재회(在會)와 함께 최연소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동몽진사(童蒙進士)’로 불렸다. 수면이 호열자(虎列刺: 콜레라)로 3남을 모두 잃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3남 태회가 수면에게 양자로 와서 한 동안 살았다고 한다. 이후 수면이 1남 1녀를 낳자 태회는 본가로 돌아갔으나 태회는 수면의 문하에서 서화를 익혔고 수면의 화법을 이었다.
1909년 잠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자로 활동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낙향하여 보성군 사립보성학교, 능주군 사립육영학교, 순천군 송광사에 있었던 사립보명학교 등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문장과 서예에 두루 뛰어나 지역 고승과 문인들의 비문과 현판 등을 많이 써서 영암 도갑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구례 천은사 등 전남지방의 유명사찰에 남아있다. 1920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오산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 한문교사로 초빙된 이후 고창으로 이주하여 조선역사와 한문, 서화를 가르쳤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서부(書部)에 「해서(楷書)」로 입선한 후 1924년 제3회, 1928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글씨로 도합 3회 입선하였다. 1925∼1929년 곧 3회에서 8회까지, 그리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사군자로 입선하여 글씨로 3회, 사군자로 6회 입선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송태회는 고창과 전주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하며 활동하였다. 송수면의 화풍의 영향을 받은 강건한 필치의 산수화를 그렸고 산수화와 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畵目)을 잘 그렸다. 1927년에는 의재(毅齋)허백련(許百鍊)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한 후 작품을 남겼다. 문집으로 미간행 필사본 『염재유고(念齋遺稿)』전7권이 있다.
조선미술전람회 9회 입선(글씨: 1922, 1924, 1928년, 사군자: 1925, 1926, 1927, 1928, 1929, 19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