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 점차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한인들은 1910년에 타바스코주(Tabasco州)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1918년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지회(支會)로 프론테라지방회(Frontera地方會)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 멕시코의 유카탄(Yucatán) 지역으로 들어온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1909년 경에 점차 농장을 떠났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심각한 생활고를 겪게 되자, 점차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다. 특히 신광희·김제선·정춘식 등은 1910년 12월에 타바스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농장 주인과 5년의 계약을 맺고 농사를 지었는데,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신한동(新韓洞)’이라고 불렀다. 동장으로는 정춘식을 선출하였고, 대표에 신광희, 서기에 김기창, 재무에 박국천, 찬조원에 김윤원·김태진 등을 뽑았다. 1911년 1월 25일에는 자치 제도를 조직하였고, ‘멕시코 타바스코 신한동 헌장’ 12조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부터 물난리가 심하게 나자, 다시 유카탄으로 돌아갔다.
1917년 3월에 한인들은 다시 프론테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의 한인들은 여러 곳에서 들어왔지만, 곧바로 한인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채소를 팔아 생활은점차 안정되어 갔다. 1917년 3월 4일에는 제1회 통상회를 개최하여 의무금을 거두었고, 박선일을 외교원으로 뽑았으며, 프론테라 지역의 멕시코 지방 관리와 교섭하여 한인 자치권까지 얻었다. 6월 3일에 개최된 통상회에서는 회원들이 모이는 장소를 정하였고, 프론테라 동포 총회의 가옥 보상금으로 멕시코 돈 53원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10월부터는 애국동맹금으로 매월 1원씩 저축하도록 정하기도 하였다.
그 뒤 12월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北美總會)에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여, 1918년에 정식으로 프론테라지방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회장은 김세원이 맡았고, 그 외에 부회장에 이학서, 총무에 신오삼, 서기 및 학무에 김제선, 재무에 방한조, 구제에 김우용, 외교에 김경국, 대의원에 김태진, 사찰에 김문옥, 평의원에 김순일·김양수·신이서 등이 선임되었다. 3월 11일에는 회관 건립을 시작하여 29일에 완공하였으며, 31일에 낙성식을 성대히 치루었다. 회관은 비록 3∼4칸 크기의 초가집으로 총 공사비가 1백원에 불과하였지만,한인들이 직접 지은 매우 귀중한 건물이었다.
프론테라지방회는 1919년 3·1운동 때에 독립의연금을 모금하는 한편, 왜화배척(倭貨排斥) 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여러 곳의 교회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꾸준히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자, 1921년에 대부분의 한인들은 쿠바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 3/4 정도의 회원 역시 쿠바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지방회의 모든 서류와 집기도 쿠바로 옮겨 갔다.
이후에도 프론테라에 남은 한인들은 여전히 ‘프론테라지방회’라는 이름을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공인덕이 회장을 맡아, 총무에 여춘근, 서기 및 학무원에 김태진, 재무에 임억복, 법무원에 유성여 등을 선임하였다. 하지만 1928년 경에나머지 한인들마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자, 9월에 열린 통상회에서 단체의 이름을 ‘알바로 오부리곤’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