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가요 ()

국악
개념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부르던 노래. 애국계몽가요 · 계몽운동노래 · 계몽창가 · 애국창가.
이칭
이칭
애국계몽가요, 계몽운동노래, 계몽창가, 애국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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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부르던 노래. 애국계몽가요 · 계몽운동노래 · 계몽창가 · 애국창가.
개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에게 강제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한국은 민족적 당면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국권회복운동에서 노래는 급속한 결속력과 전파력을 발휘하였다. 계몽가요는 항일의병운동노래와 구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특히 이바지한 노래들을 말한다.

연원 및 변천

계몽가요는 1890년대 중반 애국가 부르기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기 한국 민중들이 가장 많이 지어 부른 노래가 애국가였고, 가사와 선율이 다른 여러 애국가들이 전국 각지에서 불려졌다. 애국가 부르기는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가요운동과 맥을 함께 했다. 계몽가요는 각종 창가집, 찬미가집, 신문 등에 게재되며 학교와 교회, 사회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로 인해 애국충절을 담은 계몽가요가 열창되었고, 국권회복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에서 1909년이 계몽가요운동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의 강력한 창가 단속으로 부국강병과 애국독립을 고취하는 계몽가요는 공공장소에서 거의 불리지 못한 채 지하로 은폐되었고, 체제순응적인 노래들만이 공식적으로 유통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3ㆍ1운동의 저항정신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으로 통치전략을 바꾸며, 일정 한도 내에서 한국인의 문화활동을 허용했다. 이때 여러 청년단체들과 신문사들이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정신을 잇는 문화운동과 야학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야학운동은 일제강점기 계몽운동의 핵심으로, 문맹을 타파하고 민중을 계몽시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운동이었다. 이러한 청년운동과 야학운동을 통해 대중각성을 위한 여러 계몽가요들이 만들어 불려졌다.

내용

계몽가요는 배움의 노래, 체력강화의 노래, 봉건파타의 노래, 애국가, 애국충절가, 항일가, 독립가, 단결가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음악적 양식은 주로 익숙한 민요나 일본식 창가, 찬송가, 서양노래의 선율에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방식이었고, 한국작곡가에 의해 작곡된 곡들도 있었다.

실력양성을 고취하는 노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학도가」였다. 1900년대는 학도가의 시대였다. 당시 「학도가」는 선율과 가사가 다른 여러 종류가 불렸는데, 일본의 「철도창가」에 가사를 바꾸어 부른 「학도가」, 1905년 김인식이 작곡한 「학도가」, 이상준 작사의 「학도가」 등이 있다. 그밖에 학문장려를 위한 계몽가요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을 차용한 「권학가」와 도산안창호가 작사한 「점진가」 등이 있다. 「점진가」는 '공부에 점진하여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정신으로 설립된 점진학교(漸進學校)의 교가였는데 점차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정신교육뿐만 아니라 체육교육도 매우 중요했다. 사립학교와 사회단체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체력강화를 목표로 각종 운동회를 열었고, 이때 애국가를 비롯한 계몽가요들이 불려졌다. 대표적인 체력강화 노래로는 다양한 형태의 「운동가」들, 안창호 작사의 「소년행진가」, 김인식 작곡의 「소년남자가」 등이 있다.

계몽가요의 정점은 애국가에 있었다. 19세기말 전국에는 이미 십여 개 이상의 애국가가 불려졌고, 1902년 대한제국에 의해 공식적인 국가가 제정 발표되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가 조선 아악풍으로 작곡한 곡으로 지금까지 알려졌으나, 최근 헐버트(Homer B. Hulbert)가 채보한 "parami punda(바람이 분다)"로 시작하는 민요를 기초로 에케르트가 편곡한 곡이라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선율은 민중들에 의해 다양한 가사의 애국가로 바뀌어 불려졌다. 그 밖의 애국가류 노래로,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슬픔과 결의를 담은 「거국행」(안창호 작사, 이상준 작곡), 미국 군가(겸 찬송가) 「조지아 마치(Georgia March)」의 선율을 차용한 「독립군가」, 안창호의 유품 『구한말 애국창가집』에 수록된 「독립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안창호의 「독립가」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대한제국 만세를 부르자'는 혁명적인 계몽가요로, 애국계몽운동의 정점을 이룬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문화운동 및 물산장려운동으로 대표되는 경제자립운동, 문자보급운동,

야학운동 등에서 불려진 계몽가요로는 「야학가」, 「조선물산장려가」, 「금주가」, 「한글기념가」, 「문자보급가」 등이 있다. 이때 안창호와 더불어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였던 남궁억이 많은 계몽가요들을 만들었는데, 「기러기 노래」, 「일하러 가세」, 「무궁화 동산」, 「조선지리가」 등이 남궁억이 만든 노래이다.

한편 계몽가요로 알려진 최남선의 「경부철도가」는 철도를 통한 문명예찬과 개화만을 주장한 친외세적인 노래로서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최남선의 「경부철도가」를 기점으로 창가는 한국 민중의 공동의지를 담아내던 애국계몽적 성향을 떠나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주로 노래하는 유행가적 경향으로 이전되었다.

의의와 평가

계몽가요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민족의 역사적 수난을 노래운동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에서 특정인들에 의해 불려졌던 노래가 아니라 한국 민중과 음악인들이 함께 전국적으로 펼쳐나간 노래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 뒤에 숨겨진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침략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과 이를 정면에서 지속적으로 치열하게 비판하고 투쟁하지 못했다는 점에 그 운동적 한계를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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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 민속원, 2006)
『우리양악 100년』(이강숙ㆍ김춘미ㆍ민경찬, 현암사, 2001)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이중연, 혜안, 1998)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최기영, 일조각, 1997)
『한국민족운동사』(최경숙, 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한국근대음악사』(노동은, 한길사, 1995)
『한국양악백년사』(이유선, 음악춘추사, 1985)
「프란츠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가인가?-대한제국 애국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경분ㆍ헤르만 고체프스키,『역사비평』10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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