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월정사 산내 암자인 중대(中臺) 사자암(獅子庵) 향각(香閣)에 봉안했었던 것이지만, 현재는 훼손과 도난 등의 문제로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불상의 내부에서는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해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 다라니(陀羅尼)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서 발원문의 기록을 통해 1894년(고종 31) 긍법(肯法), 축연(竺衍), 윤익(潤益), 창조(昌照), 성민(性敏), 운조(雲照) 등 6명의 승장(僧匠)이 사자암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조(木造) 기법으로 만들어진 비로자나불 좌상은 전체 높이가 38㎝이며, 무릎 폭이 29.5㎝로, 당시에 제작된 불상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는 작은 편이다. 나지막한 육계(肉髻)에 나발(螺髮)이 굵직굵직하며, 중앙 계주는 뚜렷하지만, 정상 계주(頂上髻珠)는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계란형의 얼굴은 두 볼에 살이 통통히 오르고, 눈과 입도 자그마하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불의(佛衣)는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있는 반달 모양의 옷자락과 왼쪽 팔뚝 위에 Ω형으로 주름진 옷자락을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착의 형식은 고려 후기의 화성 봉림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시작으로, 1467년(세조 13) 서울 원각사지 삼층석탑 부조 불상, 15세기 후반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 불상 등에서 나타난다.
오른손 검지를 곧추 세우고, 그 위를 왼손 검지가 덮으면서 나머지 손가락이 오른손 전체를 감싸 쥐는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 가운데 좌권인(左拳印)의 형태이다. 1650년(효종 1)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동일한 수인의 형태가 나타나며, 1622년(광해군 14)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1624년(인조 2)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 1636년(인조 14)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은 비록 손의 모양이 반대이지만, 유사한 형태로 판단할 수가 있어 이와 같은 도상(圖像)이 조선 후기에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동시대에 제작된 불상들에 비해 크기가 소형이고, 제작 시기도 19세기 말로 늦은 편에 속하지만, 정확한 제작 연대와 봉안 사찰을 확인할 수 있는 복장 발원문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의 기준 작품이 된다.특히 불상을 조성한 인물 가운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불화승(佛畵僧) 보암당 긍법, 고산당 축연, 범화당 윤익 등의 참여는 주목된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당시 조각승(彫刻僧) 외에도 다양한 영역의 장인이 불상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어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