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문수전(文殊殿)에 봉안되어 있는 제석천왕상(帝釋天王像)으로, 2011년 8월 12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제석천은 수미산(須彌山) 정상 도리천(忉利天)에 있는 제석천궁(帝釋天宮)에서 사천왕(四天王)을 거느리고 불법(佛法)과 불제자(佛弟子)를 보호하는 신(神)이다.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 인드라(Indra)를 수용한 것으로, 경전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 등불 등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석굴암에 조성된 예를 통해 늦어도 8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는 신앙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조각과 회화 등 다양한 형태로 작품이 남아 있어 제석신앙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제석천왕상의 복장에서는 1645년(인조 23)에 필사된 조성 발원문과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 만들어진 후령통(喉鈴筒)이 발견되었으며, 전적(典籍)으로는 1460년(세조 6)에 개판된 삼경합부(三經合部), 법화경(法華經) 2종, 다라니(陀羅尼) 등이 납입되어 있었다. 또한 상의 바닥에 범자진언(梵字眞言)과 함께 주서(朱書)로 쓰여진 ‘동치원년임술(同治元年壬戌)’의 기록이 남겨져 있어 1862년(철종 13)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조로 만들어진 제석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의좌형(倚坐形)으로, 머리에 화려한 구름무늬가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쓰고, 정수리 부분에는 보계(寶髻)가 높이 솟아 있으며, 보계에서 이어진 두 가닥에 보발(寶髮)은 둥글게 말아 귀 뒤로 말려져 있다. 원형에 가까운 얼굴에는 얇지만 둥근 눈썹, 길고 가늘게 뜬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작고 얇은 입, 살이 많이 올라 늘어진 볼과 턱 등의 표현에서 온화하면서 자비로운 인상을 살펴볼 수 있다.
몸에는 소매가 넓은 대수포(大袖袍)를 입고, 그 안에는 이중의 상의를 입었으며, 목과 어깨 부분을 덮는 운견(雲肩)을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다시 녹색의 천의를 목에 두르고 있는데, 이러한 착의법(着衣法)은 흡사 왕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두 손은 가볍게 들어 올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볍게 들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는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다. 가슴 중앙과 양쪽 무릎에는 화려한 영락(瓔珞)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검은 신을 신은 두 발은 치마 밖으로 살짝 나와 있다.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된 제석천상의 도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제석천도(帝釋天圖, 日本 聖澤院 소장)와 유사하다. 이 그림은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는 제석천은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넓은 대수포를 입고 있으며, 화려한 영락을 가슴과 다리 위에 드리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양손으로 수미산 제석천궁이 그려진 부채를 받쳐 들고 있는데, 수인의 형태가 상원사 제석천상과 흡사하여 원래는 상원사의 제석천상도 이와 같은 형태의 부채를 지물(持物)로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상원사에서 고려시대 제석천도의 도상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 전기에 제석천상을 제작했던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복장 발원문에서 1466년(세조 12)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와 그의 남편 정현조(鄭顯祖, 14401504)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오대산 문수사에 조성한 여러 불 · 보살상들 가운데 제석천상이 포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제석천왕상은 복장 유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1645년(인조 23)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도상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존하는 17세기 제석천왕상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