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영산전(靈山殿)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 삼존(釋迦三尊) 및 제존상(諸尊像)으로, 2011년 8월 12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영산전은 고대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가 여러 보살과 제자 · 호법신중 등을 모아 놓고『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던 당시에 장면을 사찰에 옮겨 놓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갖춘 상원사 영산전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提花竭羅菩薩)이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이루며 봉안되어 있다. 그 좌 · 우에는 당시에 설법을 듣던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이 각 8구씩 모두 16구가 있다. 이들은 현장(玄裝)이 번역한『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에 거론된 나한들로, 왼쪽에는 1, 3, 5, 7, 9, 11, 13, 15 나한이, 오른쪽에는 2, 4, 6, 8, 10, 12, 14, 16 나한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15나한과 16나한 끝에는 제석천(帝釋天) 1구와 사자(使者) 1구씩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어 총 21구의 존상이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들은 미륵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과 중수 발원문을 통해 1711년(숙종 37) 혜주(惠珠), 정행(淨行), 사언(思彦) 등 3인의 조각승(彫刻僧)과 진취(進趣), 도청(道淸) 등 2명의 화승(畵僧)에 의해 제작되어 천주산(天柱山) 운복사(雲覆寺)에 최초로 봉안되었다가 이후 1886년(고종 23) 왕실의 내탕금(內帑金)을 시주 받아 당대 최고의 화승인 혜산당(惠山堂) 축연(竺衍)이 채색하여 오대산 상원사로 이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 내에 봉안된 석가삼존 및 제존상은 모두 좌상의 형태로, 그 제작 기법은 본존불인 석가불과 일부 나한은 소조(塑造)이며, 나머지 상들은 목조(木造)로 제작되었다. 본존인 석가불은 높고 큼지막한 육계(肉髻)에 나발(螺髮)을 촘촘히 새겼으며, 육계 중간에 위치한 중앙 계주도 뚜렷한 편이다. 풍만한 얼굴에는 코와 입이 거의 붙어있어 턱이 상대적으로 길어 보이며, 상체가 얼굴에 비해 작고 길며 하체는 낮고 짧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빈약하고 양감이 없는 편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갖추고 있다.
석가불 좌 · 우에 위치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은 높고 넓은 독특한 형태의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두 손에 용화(龍華)와 여의(如意)를 쥐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 본존과 동일하게 길고 풍만한 얼굴, 긴 상체에 비해 낮은 하체의 표현 등은 공통점이다.
나한들은 삼존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각 존자별로 개성 있는 얼굴을 표현하였다. 제1존자인 빈도라발라타사 존자(賓度羅跋囉惰闍 尊者)는 큼지막한 민머리, 사각형의 얼굴, 그 안에 눈꼬리를 내린 눈썹과 주먹코, 그리고 U자로 깊이 팬 두 뺨과 살짝 벌려 앞니를 들어 낸 입에서 늙은 비구지만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이다. 이에 비해 제2존자인 가락가벌차 존자(迦諾迦伐蹉 尊者)는 수도승의 머리를 하고, 방형의 얼굴 안에는 길고 가느다란 눈썹과 매부리코, 작지만 굳게 다문 입에서 젊은 수도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16나한들은 각 존자별로 다양한 얼굴 표정을 갖추고는 있지만, 신체의 표현에서는 다소 형식화가 진행되었다.
15나한과 16나한 끝에는 천의를 입고 합장하고 있는 제석천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긴 막대를 쥐고 있는 사자가 있는데, 이 상들의 얼굴, 신체 등에서 삼존불과 유사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석가삼존 및 제존상은 조각 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제작 시기, 봉안 사찰, 조각승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성 발원문과 이후 오대산 상원사로 이안한 중수 발원문 등을 동반하고 있다. 또한 개성 있고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18세기 전반에 나한상 연구의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