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발발 후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는 한정된 자금과 인적자원을 고려하여 자체 조직을 간편케 하는 대신 미국인들로 주로 구성된 한미협회를 전면에 내세워 대정부 로비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이 협회가 창설된 것은 1942년 1월 16일이며 미국의 ‘외국대행기관등록법’에 따라 법무부에 정식 등록했다. 협회의 사업은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인들의 동정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 방법으로는 각종 회보 및 통신문의 발행, 언론보도 자료의 배포, 대중강연 등이 제시되었다. 협회 운영은 주미외교위원부의 지원과 회원들의 기부금에 의존했다. 사무실은 워싱턴 시내(1701 I Street N.W.)의 콜로라도빌딩 327호였다.
1941년 1월 현재, 협회의 이사회(Board of Trustees)와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에 등재된 사람은 모두 36명이었다. 그들의 직업을 보면, 상·하원 의원, 주지사, 외교관, 목사, 대학 총장과 교수, 출판사 회장, 잡지 편집인, 언론인, 작가, 사회사업가, 현직 군인 등 다양했다. 중국인도 2명이 포함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린위탕(林語堂)이었다. 한미협회를 주도한 사람은 이사들이었다. 이사장인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사는 연방상원의 원목(chaplain)으로 이승만을 정계 요로의 인사들에게 소개했다. 회장인 크롬웰(James H. R. Cromwell)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캐나다 특명전권공사를 지낸 경력을 활용하여 국무부와의 교섭에 앞장섰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INC라는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던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는 협회의 위촉을 받아 홍보 및 선전업무를 대행하고, 변호사인 스태거스(John W. Staggers)는 법률자문을 맡았다. 이 두 사람은 법무부와 국무부에 이승만의 ‘대리인(agent)’으로 등록하면서 일체의 보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한국의 독립과 이승만의 집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