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 (Los Angeles )

산업
단체
1971년 6월 7일 창립된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의 후신(後身).
이칭
이칭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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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71년 6월 7일 창립된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의 후신(後身).
개설

197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한인상공인단체가 1987년 L.A. 한인상공회의소로 개칭되었고,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정부에 등록된 비영리법인 단체이다.

설립목적

로스앤젤레스지역(L.A.) 한인상공인 간의 출혈경쟁을 지양하고 상호친목과 공동이익창출을 위해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으로 미국이민이 본격화되면서 2년 후인 1967년부터 우리 동포들에게도 영주권이 발급되었고, 5년 후인 1972년부터 시민권 신청이 가능해졌다. 또한 1972년 4월 19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취항하면서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과 한인상권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이런 환경변화에 힘입어 미국동포사회는 교회를 비롯하여 정치·경제·문화·교육·사회봉사·전문학술단체 등 새로운 조직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였고, 경제단체로는 1971년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가 조직되었다.

당시 미국동포사회는 가발업자들 간에 가격 덤핑경쟁이 치열하여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다. 이에 무역인과 상공인 모두가 상호출혈을 지양하고 친목도모가 필요하다는데 공감한 결과 1971년 3월 28일 김중정(무역업), 김종식, 김경진, 김시면(가발업), 김영권, 남궁봉, 박규현, 배기생, 소니아 석(부동산업), 이교숙(가발업), 이용, 정화섭, 조지 최(부동산업) 등 36명이 L.A. 시내 힐튼호텔 중식당 ‘대원각’에서 가칭 ‘남가주한인상공회의소’ 발기인대회(준비위원: 조지 최, 김종식, 남궁봉, 이용, 이교숙)를 열고, 그해 6월 30일 제1차 총회에서 조지 최(George Chey, 국제부동산대표)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정관(전문 25조)은 이교숙이 한국에서 구해온 ‘대한상공회의소’와 ‘경제인연합회’ 회칙을 참고하였고, 사무실은 유니언뱅크빌딩(3801 Wilshire Blvd) 1101호에 두었다.

기능과 역할

1971년에 한인상공회의소를 조직한 남가주한인비즈니스맨들은 그동안 한국상품 구매를 위한 모국방문, 대한상공회의소·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위원회·무역협회·지자체와의 통상 증진, 한인상공인 명부 발간, 현지 한인기업체 경영실태조사, 국내중소기업 해외상품전 및 직업박람회 개최, 세계한상대회 참가 등 다양한 교류·협력사업들을 전개해왔다.

현황

현재 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 임원은 회장 1인과 부회장 3인이며, 이사는 145명(설립 당시 31명, 2020년 7월 현재)인데 결격사유가 없는 한 임기제한이 없다. 회장은 이사로 3년 이상 활동한 사람에게 회장 입후보자격을 부여하며 해당년도 5월 정기이사회에서 선출한다. 이사회는 150명 이하의 이사로 구성되며, 이사장 1인, 부이사장 3인을 두고 있다.

정관은 1976년 3월 1일 제1차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1차례 정관이 개정되었고(2020년 7월 현재), 산하기구로는 2012년 현재 운영위원회, 재정위원회, 정관위원회, 회원위원회, 커뮤니티봉사위원회, 상공인의 밤 위원회, EXPO위원회 등의 위원회와 갈라, 세미나, K-타운개발, 경제개발 및 웹사이트, 대외협력 및 비즈니스믹서, 홍보 및 멤버십, E-MBA, 주니어 챔버준비위원회, 아시안챔버골프 등의 분과위원회를 두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가주한인상공회의소는 회원 간의 친목도모와 함께 각종 세미나(융자, 무역, 부동산, 신용조회, 소자본투자 등), 한글학교지원 모금, 장학금 지원, 한인경제실태조사 등을 통해 현지동포경제 활성화와 코리아타운 번영에 앞장섰고, 1970-80년대 모국방문사절단 구성과 한국상품 해외수출알선, 선진기술 제공 등으로 한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후에 조직된 무역인협회, 봉제협회, 여성경제인협회, 한미은행 등 각종 경제·금융단체들의 모체로서, L.A.지역에 정착하길 원하는 이민 초기 동포들을 돕는 일에서부터 동포상공인을 지원하고, 이들과 미국주류사회를 잇는 가교로서, 그리고 동포상공인 간의 과당경쟁과 동종업소 난립 방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는 모국상품 수출입 알선 등 단순중개기능에서 탈피하여 시의원 선거지원, 대정부 로비 등 현지사회에 뿌리내리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미주한인이민100년사』(한미동포재단, 미주한인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2002)
『교포사회경제실태조사보고서』(남가주한인상공회의소, 1977)
『미주생활정보』(남가주한인상공회의소, 1977)
『미주중앙일보』(2009.1.15)
『조선일보』(2006.11.3, 2007.9.10, 2008.5.6)
『경향신문』(1970.5.16, 1977.3.21, 1987.3.18, 1990.8.21)
『동아일보』(1976.3.27, 1981.3.20, 1991.3.19, 1994.1.14)
『매일경제』(1974.11.27, 1975.11.27, 1977.3.22, 1977.3.25, 1984.8.7, 1984.8. 13, 1984.12.13, 1987.3.31, 1991.4.12, 1995.9.13, 1997.3.27, 1998.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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