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합작 성격의 주식회사로 사장 찰스 피셔(Charles Fisher), 총무 최영만(崔永萬), 사무원 조성학(趙成學)이 각각 역할을 분담하고, 자본금 2만 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설립한 무역회사이다.
1903년 하와이이민 이후 1910년까지 동포경제상황을 살펴보면 사탕수수·오렌지농장, 철로부설작업장, 광산, 어장 등에서 날품을 팔거나 도시 음식점의 주방장 보조, 종업원, 일반가정집 고용원 등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극히 일부가 소규모 음식점, 채소가게, 이발소, 세탁소, 노동주선소 등을 운영하는 정도였다. 이런 미약한 경제여건 속에서도 미국동포들은 자신이 사는 곳곳마다 교회와 학교 그리고 각종 단체를 설립하였고, 독립운동자금 후원에 적극 동참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미국동포사회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근대적 의미의 회사이다.
대동보국회(1907.3.2)의 회원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한미무역회사의 경우, 본사 사장을 미국인이 맡음으로써 조선통감부의 한인회사에 대한 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1910년 6월 서북학회 회원으로서 미국 체류경험이 있던 서기풍(徐基豊) 등을 주축으로 평양지사를 설치하여 사업 확장에 나섰으며, 그 해 7월 “미국물품은 국내로 수입하여 우리 동포의 물품제조를 발달케 하며, 국내물품은 외국에 수출하여 거대한 이익을 얻게 하자”는 취지로 본사 총무로 일하던 최영만을 국내로 파송하였다. 각종 잡화 견본, 화장거울, 특제 구두, 장갑, 시계 등 현지 물품 상당량을 갖고 귀국한 최영만은 청도군수(1899) 출신의 정인호(鄭寅琥)와 대리점 계약을 맺고,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황성신문』에 ‘한미무역회사 총무 최영만’과 ‘한미무역회사한국총지사대리인 정인호’ 이름으로 십여 차례 신문광고에 나서는 등 물품교역에 힘을 쏟았다. 샌프란시스코 현지에서도 자본금 추가 확보를 위해 주식매입(주당 15달러)을 권고하는 광고를 8월 3일과 8월 10일 『신한민보』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강탈당하고, 국내 토산물품의 대미 수출이 어렵게 되자 샌프란시스코 현지에 큰 상점을 세우려던 본사 계획이 차질을 빚었고, 이후 국내민족자본을 압살하고 해외자본의 국내진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회사령’이 1911년 1월 1일자로 시행되자 국내지점들의 존립은 물론 정상적인 영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더군다나 일제가 한인에게 광산권을 허가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현지 주주들의 동의 없이 최영만이 물품판매로 얻은 수익금을 평북 운산(雲山)광산에 임의로 투자하여 회사 자금운영에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국내외 사업이 원활치 못한 상태에서 최영만의 미국 귀환마저 차일피일 미뤄지고, 현지에서의 자본금 추가 확보가 어렵게 되자, 1911년 하반기부터 회사 장래에 대해 의문이 논의되었고, 급기야 사장 찰스 피셔와 서기 조성학의 이름으로 각각의 주주들에게 회사 존속과 파산 신청에 대한 찬반의견을 묻는 등 회사 청산 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1912년 초, 회사가 조만간 청산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최영만은 1월 27일자 편지에서 회사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넘겨주면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겠다고 공언하였지만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년여의 한미무역회사 활동은 막을 내렸다.
미국동포이민사에서 한미무역회사의 출현은 초창기 미국동포사회가 서구 자본주의경제구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상업과 실업의 중요성을 국내로 이식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엿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다. 또한 회사 주주로 참여했던 최영만, 조성학, 서기풍, 정인호 등은 대동보국회, 서북학회 회원 또는 대한제국 지방관료 출신으로서 국권상실기에 국권회복과 산업자본 확보를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파산(1912)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한미무역회사에서의 활동과 좌절경험이 일정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