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석정 변해옥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석은(石隱)이다.대구 계성중학교에서 서진달을 만나 서양화의 기초를 배웠다. 1942년 일본군 해군하사관 후보생으로 뽑히자 만주로 피신 후 서진달의 추천으로 신경시립미술원(新京市立美術院) 서양학과에 편입하였다.
변종하의 작품은 1965년을 전후로 크게 변화된다. 전기는 다시 서울시대와 파리시대로 세분화되며, 후기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그리고 투병시기인 1980년대 후반 이후로 세분된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1956년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포푸라」로 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1954부터 1957년까지 연속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시기가 전기 중에서도 서울시기에 해당한다.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지금의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중인 1960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알리앙스 프랑세스(Allaiance Français Paris)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소르본느대학(Université de la Sorbonne)에서 수학했다.
1962년 프랑스 미술 비평가이며 시인인 르네 드르앙(Rene Druin)에게 발탁되어 루시앙 뒤롱 화랑(Galerie Lucien Durand)과 계약을 맺고 1967년까지 이곳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런던의 쿠퍼 화랑(Couper Collection), 뮌헨의 마가렛 라우더 화랑(Margrette Lauther), 파리시립근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 de la Ville de Paris)의 ‘살롱 콤파레죵(Salon Comparaison) 10주년 기념전’에 초대되어 작품을 출품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주최 프랑코 알마뉴 초대전에도 참여했다. 파리시대의 대표작으로는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와 「돈키호테」 연작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은 회화에서 추방된 문학적 요소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신형상주의’ 혹은 ‘설화적 상형주의’라고 불린다.
1965년 유네스코 연구비로 멕시코와 마야 유적지를 답사한 후 귀국하여 이전의 표현주의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돈키호테 이후」연작에서는 전통 목각탱화나 민화, 지함(紙函) 등에서 발견되는 소재와 기법을 연구하여 요철회화(凹凸繪畵)라고 하는, 소위 부조 같은 독특한 조형어법을 시도했다. 판 위에 하드보드나 베니아판을 오려붙인 다음, 그 위에 삼베나 거즈를 덧씌우고 채색을 하는 요철회화(凹凸繪畵)를 통해 변종하는 회화의 재료와 기법을 확장시켰으며 내용에 있어서는 현실비판적인 우화를 통해 한국사회를 풍자했다.
196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귀국한 지 10년 만에 가진 개인전(현대화랑, 1975년)에서 한국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특유의 시적인 정서를 자아내는 「어떤 탄생」연작을 발표했다. 1970년대 작품이 현실비판적인 우화였다면, 1980년대에는 ‘서정적 풍경’이라는 주제로 꽃, 새, 나무, 달, 잠자리 등 우리에게 친근한 풍경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묘사하여 주목을 받았다. 문학성 짙은 시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 이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표정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원초적 정감이 배어있어 ‘설화적 구상’이라 일컬어진다.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담백하고 세련된 세계를 구축한 변종하는 투병생활 중 사물의 원초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과 자신의 심상을 표현한 「자화상」시리즈를 발표했다.
변종하는 유화 외에도 분청과 청화로 만든 도자기 작품과 판화 등 여러 영역을 시도하였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수차례에 걸쳐 작품을 발표해 오다 2000년 7월 29일에 사망하였다.
1978~1979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