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은 1914년 평양시 경상동에서 철공소를 경영하는 박도환의 다섯째로 출생했다. 해방 전 평양에서 숭인학교, 공업실습학교를 마친 후 서울에 가서 청년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명고옥동해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동경의 동아상업학교로 적을 옮겨 학교를 마친 후 일본대학 예술과에 진학했다. 이때 박학은 진보적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3·1극장’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조선인 거주지역으로 선전극을 하러다니기도 했다. 1935년에 결혼을 하고, 1936년 대학 중퇴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연극협회’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곧 파산했다. 1937년 2월 평양에서 새로운 연극단체를 조직하려던 박학은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극단연극좌’, ‘낭만좌’, ‘조선무대’, ‘국민좌’, ‘청춘좌’ 등 여러 극단을 전전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태을민, 황영일, 김세영 등과 함께 ‘극단예술좌’를 조직해 「독립군」을 무대에 올렸다가 우익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월북해 이규환 감독이 연출한 「해연」(1948)에 출연했고, 이후 월북해 조선예술영화 촬영소 소속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북한의 첫 극영화 「내 고향」에 조연으로 출연하였고, 1950년 개봉한 북한의 두 번째 극영화 「용광로」에서 주인공 룡수 역을 맡은 후 전쟁 중에도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1950), 「또 다시 전선으로」(1952), 「비행기 사냥군조」(1953)를 비롯해 「정찰병」(1953)의 주인공을 맡았다. 1958년에 연극 「위대한 힘」의 지배인, 1959년 극영화 「두만강」의 주인공 등 연극배우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0년대 이후 박학은 주로 감독으로 활동했는데, 첫 연출작은 「분계선마을에서」(1961)이다. 이후 「붉은 선동원」(1962), 「한 지대장의 이야기」(1966), 「마을사람들 속에서」(1968), 「금강산처녀」(1969)를 연출하였다. 1970년에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백두산창작단의 연출가가 되어 북한이 불후의 고전 명작이라고 평가하는 「꽃 파는 처녀」(1970)를 연출했다. 이 외에도 백두산창작단에 소속되어 「세상에 부럼 없어라」(1970)와 수령형상화 영화의 첫 작품인 「누리에 붙는 불」(1977) 그리고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1978), 「미래를 꽃피운 사람들」(1982) 등을 연출하였다. 그는 1982년 11월 사망하였다.
박학은 공훈배우 칭호(1955), 인민배우 칭호(1963), 김일성상(1972.4.15), 노력영웅 칭호(1972.12.29)를 받았다. 그 외에도 연출 작품 「분계선마을에서」로 ‘인민상’을 받았으며, 「꽃 파는 처녀」로 제18차 까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