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함흥시 지략리의 인력거꾼 가정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원준은 어려서부터 배우들의 흉내를 내며 연극배우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졸업 후 1938년부터 함흥 등지에서 교원으로 일하다 해방 후 문화선전성과 중앙당학교의 간부양성반에서 공부하였으며, 함흥시 보안서 특별경비대 대장을 지냈다. 1946년부터 연극무대에 섰고 해방 2주년 예술축전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47년 12월부터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소환되어 활동했다. 1962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의 통신교육을 마치고, 배우활동과 함께 평양연극영화대학 겸직교원으로 일했다.
북한의 첫 예술영화인 「내 고향」(1949)의 관필 역으로 영화에 데뷔한 이래 「밝은 태양아래에서」의 인민군 사단장 역, 「최학신의 일가」에서 목사 최학신 역, 「춘향전」에서 변학도 역, 「위대한 품」에서 김구 역 등 악역, 선한 역, 노(老)역에 이르기까지 개성있는 조연에서 푸근한 인상의 아버지까지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북한에서 성공한 배우였던 만큼 영화에서 사회의 목소리, 문예정책 등을 들려주며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민족과 운명 -로동계급편」을 찍을 당시에는 80대의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강태관 역을 맡아 열연하였으며, 이 영화 마지막부의 수정촬영을 하던 도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998년 6월 30일 사망하였다.
최초의 극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후, 「최학신의 일가」 등 북한 영화사의 중요한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안정적인 경력을 이어간 유원준은 나이가 들어서는 북한에서 푸근하고 인자한 아버지상을 연기해 한국의 김승호나 최불암과 비견할 수 있는 배우이다. 사망 후 배우로서는 드물게 「인민배우 유원준」(1999)이라는 기록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북한영화사를 대표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출연작은 「내 고향」(1949), 「최학신의 일가」(1966), 「밝은 태양아래에서」(1969), 「춘향전」(1980), 「생명수」(1985), 「평범한 사람」(1985), 「북산땅의 주인」(1987), 「심장에 남는 사람」(1989), 「잊을 수 없는 추억」(1989), 「아무도 몰라」(1990), 「하랑과 진장군」(1992), 「민족과 운명」‘로동계급편’(1998)이 있다. 그리고 출연 작품 가운데 연출을 겸한 작품도 있는데, 「춘향전」은 월북한 원로 감독 윤룡규와 공동 연출하였고, 「밝은 태양아래에서」는 월북 감독 민정식이 1960년대 연출한 작품을 재해석하여 연출하였다.
1987년 김일성 훈장과 국기훈장 제1급 그리고 인민배우와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1년 조통연합 북측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사망 후 ‘사회주의 열사증’을 받았고, 시신은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