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 호는 일해(一海)이다.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를 수료하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통역장교로 입대해 7명의 국방부 장관을 보좌하였다. 이후 1955년부터 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6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필, 김용태를 필두로 한 ‘서울사대 그룹’ 멤버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 시 두 번이나 수행원으로 참가하였다. 1961년 12월에는 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3년 8월 15일 창간된 대한공론사의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
1962년 2월 공보부 자문언론분위준비회(諮問言論分委準備會) 위원으로, 동년 4월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 창립총회 부이사장으로, 10월 신문발행인협회 감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63년 12월 공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4년 5월까지 정부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장관직 사임 후에는 박정희 정부의 초기 장관을 역임한 엄민영, 박동규, 정약은 등과 함께 한국정경연구소를 설립해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64년 명지대학교 교수로 대학에 복귀하였고, 1965년 한국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문학번역협회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1967년 아르헨티나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하였고, 볼리비아 대사와 우리과이 대사직도 겸임하였다.
1976년 외교관 경험을 기반으로 유신정우회에 지명되어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장성 출신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안보연구위원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국제의원연맹(International Parliamentary Union) 한국대표단으로도 참여하였다.
음악 연주에 조예가 깊어 1950년대 중반부터 피아니스트로 다수의 개인 연주회를 개최하였고, ‘아카데미 삼중주단’을 구성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1년 9월에는 음악 전문가 자격으로 KBS교향악단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KBS 교향악단 총감독직을 수행하였다.
영문학자로서 김소월 시집과 조병화 시집을 영문으로 번역해 출간하는 등 다수의 시집을 번역·출간하였다.
상훈으로는 대한민국 1등 수교훈장 광화대장과 아르헨티나 1등 수교훈장이 있다.
2005년 11월 15일 향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