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출생하여, 일본 오사카대학[大阪大學] 약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제약 회사를 경영하면서 악귀가극단(樂貴歌劇團)을 운영했으며, 3년간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동청년회(大同靑年團), 한국청년단(韓國靑年團)에 관여하며 회장직을 맡았으며, 대한청년단 영주군단장으로 활동하며 박애원(博愛園)을 개원해 초대 원장직을 수행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주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군에 대한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당선 후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 소속으로 활동하던 중 의원비행 규탄사건을 계기로 박순천, 윤길중 등과 함께 탈당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 문화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국회 문교위원 소속으로 1951년 11월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을 위해 만들어져 민주국가의 언론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광무신문지법안폐지법(光武新聞紙法案廢止法)」을 발의해 통과시켰으며, 「국립극장 설치법 개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한편 「귀속재산 처리법 개정안」이 상정될 때 국회의원 간에 수표가 돌았다고 폭로해 권태욱 의원과 30일간 출석정지 징계처분을 받았으며, 1954년 1월 자유당 내 조선민족청년단계(朝鮮民族靑年團系)로 분류되어 중앙당부 부장회의에서 의원 제명처분 결의를 받았다.
1956년 3월 30일 자유당에서 소외된 조선민족청년단계를 중심으로 새로이 창당된 공화당에 잠시 가입했지만, 다시 공화당을 탈당하고 1956년 5월 자유당에 재입당했다.
1963년 1월에는 자유당계 정치인 100여 명과 함께 5·16군사정변 주역들에 대해 민정이양 및 정치적 속박을 배제하는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으며, 민정당에 입당한 5월에는 민정당 내 일부 소장파 정치인들이 당의 혁신을 요구하며 만든 모임인 신조회(新潮會)의 결성에 가담했다.
민정당 내에서 체질개선과 세대교체를 목표로 당내 투쟁을 이어오던 중 민정당이 구 신민계의 독선과 전횡으로 붕괴되었다는 이유로 1963년 5월 18일 민정당 탈당성명을 발표했고, 1963년 6월 21일 신조회 회장 자격으로 공화당에 입당했다.
1987년 11월 김종필이 추진한 신민주공화당 창당 때에는 경상북도 김천 및 금릉 지역구의 조직책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밖에 후생회(厚生會) 이사장 및 의회신문사(議會新聞社) 사장직을 역임했으며, 1989년 11월 26일 광명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