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칠성

  • 정치·법제
  • 인물
  • 현대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84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97년
  • 출생지부산광역시 서구
집필 및 수정
  • 집필 2015년
  • 김명훈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내용

1897년 6월 24일 부산시 서구 출생으로, 니혼대학[日本大學]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부산을 기반으로 상사를 경영했다.

1925년 12월 부산에서 제4계급의 해방과 대중운동 촉진을 목적으로 결성된 제4동우회에 발기인, 조선인공총동맹(朝鮮印工總同盟)의 창립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부산인쇄직공조합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1926년 9월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1927년 12월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조선경제연구소 소장직과 함께 한성주식회사를 경영했으며, 미군정 경상남도 고문직을 수행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시 병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현역 국회의원 신분으로 민보단(民保團)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그 무렵 제2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무소속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발족한 무소속구락부의 부원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었다. 그 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9년 3월 숙청되어 노동자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칠성은 1984년 5월 21일 사망해 재북인사의 묘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 - 『역대 국회의원 총람』(국회사무처, 1977)

  • - 「평양룡성구역 재북인사들의 묘를 가다」(『민족21』, 2004.5.1.)

  • - 「행방불명 의원 특별조치법 공포」(『동아일보』, 1950.12.23.)

  • - 「민보단 곧 해산」(『동아일보』, 1950.6.4.)

  • - 「김천청년연맹 제1회 정기총회」(『동아일보』, 1926.9.3.)

  • - 「인공동맹 규정」(『동아일보』, 1925.12.26.)

  • - 「제4사동우회 부산에서 발기」(『동아일보』, 19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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