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전라남도 담양 출생으로, 본관은 창녕, 호는 여남(與南)이다. 1945년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전라남도 덕청재산관리처(德廳財産管理處) 문서과장으로 재직하다 1949년 군에 입대했다. 1957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외국무관 연락실장을 역임했으며, 군 재직 시기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조선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1967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5·16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케네디 대통령과 면담했을 때 통역을 담당했다.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1963년 12월부터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미국 존슨 대통령, 닉슨 대통령, 포드 대통령, 뤼프케 서독 대통령 등 다양한 정상회담에서 통역을 전담했다.
1974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에서 물러나 이탈리아 대사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77년 8월부터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상주 수석대표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사를 마친 후 1978년 12월 유정회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79년 2월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체육계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1980년 7월 박종규 회장의 사임으로 제26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었으며,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 및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맺은 국제적 인맥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유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민체육진흥재단 이사장, 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거쳐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과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82년 7월에는 공석 중이던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한체육회 회장직을 마치고 고문으로 활동하던 중, 1985년 4월 노태우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이 민주정의당 대표로 임명됨에 따라 상근부위원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국가올림픽위원회(ANOC) 스포츠시설분과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이후 1986년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대회운영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 7월 이세기 장관의 후임으로 제6대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어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1988년 1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회 세계체육장관회의에서 부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했으며, 1989년부터는 대한체육회 상임고문직을 수행했다. 1990년 단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후 창조장학회 이사장, 세계한민족체전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체육청소년심의위원장, 2002월드컵축구대회 유치위원회 집행위원,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개최자치단체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7년 8월 25일 사망했다.
상훈으로는 은성화랑무공훈장, 수교훈장 흥인장, 수교훈장 광화장, 황조근정훈장, 엘살바도르 건국1등대십자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올림픽훈장 은장, 이탈리아공화국 대십자기사훈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