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1950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한국인 최초로 구조역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장충체육관 설계에도 참여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이었던 김상돈에게 발탁되어 서울시의 초대 수도국장으로 관계에 입문했다. 6년 3개월 동안 서울시 수도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서울시 수도행정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최초로 기업회계 제도를 도입해 그동안 적자만 보고 있던 수도행정에 흑자를 달성하게 한 행정가로도 알려져 있다.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개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건설부의 도시계획최고심의기관인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진흥위원회 건설분과 전문위원, 1968년 7월 대한상공회의소 공업소유권 보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1969년 건설부 국립건설연구소장에 임명되어 국내 최초로 항공사진 촬영에 의한 지도를작성했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당시 붕괴원인 조사 책임자이자 전국 아파트 건설 일제조사 책임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물러난 차일석 부시장의 후임으로 1970년 5월 서울특별시 제2부시장에 임명되었으며, 동년 12월 서울시 운수행정의 기본 방침과 각종 교통계획 수립을 추진하는 종합교통문제연구단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서울시 부시장으로 재직하며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발하자 이주민과의 협상 및 대책수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1년 12월부터 1973년 1월까지 강원도지사를 역임했으며, 1973년 1월 공업진흥청 신설과 함께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어 전국품질관리대회를 개최하는 등 품질관리 운동에 주력했다. 1978년 12월 최형섭 장관의 후임으로 제3대 과학기술처 장관, 1979년 12월 개각에서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어 활동하다 1980년 9월 사임함으로써 모든 공직에서 은퇴했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해 효성중공업 사장 및 회장, 효성아세아 회장, 주식회사 인터세크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밖에 기술사회 회장, 대한토목공학회 회장, 국토건설종합계획 심의위원, 공업표준협회장, 전기공사협회 부회장, 기계공업진흥회 부회장, 과학기술원 이사장, 수도협회장, 한국·방글라데시 경제협력위원장, 아태품질관리기구 회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이사장, 강원장기발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고향인 강릉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1년 4월 20일 사망했으며, 상훈으로는 홍조소성훈장, 홍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은탑산업훈장이 있다. 저서로는 1997년 한국표준협회에서 발행한 『알기 쉬운 표준화이야기』가 있다.